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백고 (문단 편집) == 생애 == 진백고는 555년에 [[진천(남진)|진천]]의 5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용화(容華) 반씨(潘氏)이다. 태어나면서 몸은 복장뼈가 불거졌고 눈은 사시로 하얬으며 체격은 왜소하였지만 말솜씨가 뛰어났다. 565년에 신안군왕(新安郡王)으로 책봉되고 식읍 2000호를 받았다. 566년에 이복형인 [[진백종]]이 황제로 즉위하자 사지절(使持節), 도독남낭야팽성동해3군제군사(都督南琅邪彭城東海三郡諸軍事), 운휘장군(雲麾將軍),팽성군과 낭야군의 태수가 되었다. 567년에는 입조하여 단양윤(丹陽尹)이 되었고 운휘장군은 그대로 받았다. 569년 진백종이 폐위되고 [[진욱]]이 황제로 즉위하자, 진백고는 단양윤은 그대로 받고 지무장군(智武將軍)으로 진호되었다. 단양윤을 맡은 뒤에는 익우장군(翊右將軍)으로 진호되었고, 이윽고 사지절, 도독오흥제군사(都督吳興諸軍事), 평동장군(平東將軍), 오흥 태수로 제수되었다. 572년에는 입조하여 시중, 익전장군이 되었고, 안전장군(安前將軍), 중령군(中領軍)으로 옮겼으며, 575년에는 사지절, 산기상시(散騎常侍), 도독남서남북연4주제군사(都督南徐南豫南北兗四州諸軍事), 진북장군(鎭北將軍), 남서주 자사를 맡았다. 진백고는 술을 좋아하는 성격이었지만 재물을 모으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받은 녹봉을 무절제하게 사용하고 많은 곳에서 구걸을 하여 남진의 황족들 중에서는 가장 가난했다. 이에 진욱은 진백고의 처지를 동정하여 특별히 은상을 내렸다. 또한 진백고는 성격이 경박했고 주에서는 정사를 처리하지 않고 매번 사냥을 나갔으며, 잠자리용 수레를 타고 민간으로 나가 백성들을 하인으로 동원하여 최대 10여 일 동안 유흥을 즐겼다. 또한 자신이 잡은 노루와 사슴을 관청에 풀어서 진욱으로부터 수차례 견책을 받았다. 578년에 다시 입조하여 시중, 진우장군(鎭右將軍)이 되었으며 곧이어 호군장군(護軍將軍)으로 제수되었다. 같은 해에 진백고는 다시 국자좨주(國子祭酒)가 되었고 좌효위장군(左驍騎將軍)을 겸하였으며, 시중과 진우장군은 예전과 같이 받았다. 580년에는 종정경을 겸하했다가, 581년에는 사지절, 도독양남서동양남예4주제군사(都督揚南徐東揚南豫四州諸軍事), 양주 자사가 되었고 시중과 장군은 예전과 같이 받았다. 진백고는 진욱의 태자인 [[진숙보]]와 서로 매우 친하였다. 한편 시흥왕 [[진숙릉]]은 강주(江州)에 있을 때 속으로 진백고가 받은 총애를 시기하여 몰래 진백고의 잘못을 들추어내고 진백고를 모함하여 법으로 처벌하려고 했다. 진숙릉이 조정으로 들어오자, 진백고는 진숙릉에게 아첨하려고 하였다. 게다가 진숙릉은 무덤을 파는 것을 좋아하였고 진백고는 사냥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는데, 이런 두 사람의 성격이 너무 잘 맞게 되다보니 두 사람은 결국 역모를 꾸미게 된다. 게다가 진백고는 궁중의 시중을 들면서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있다면 진숙릉에게 이를 누설하였다. 582년 진욱이 사망하고 진숙보가 통곡할 때 진숙릉이 진숙보를 공격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진숙보가 몸을 빼내자 진숙릉이 동부(東府)로 달아나면서 진백고에게 사신을 보냈고, 진백고는 단기로 달려가서 진숙릉의 지휘를 도왔다. 진백고는 반란이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알고 도망치려다가 사방의 문이 모두 닫혀버리자, 백양도(白楊道)로 도망친다. 조정의 추격부대가 당도하자 진백고는 난병들에 의해 살해당했고 시신은 동창관(東昌館) 문 앞에 버려진다. 사후 진백고는 작위를 삭탈당하고 폐서인되었다. [[분류:남북조시대/황족]][[분류:555년 출생]][[분류:582년 사망]]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