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덕여왕 (문단 편집) == 생애 == 647년 1월 [[비담의 난]] 와중에 1월 8일날 [[선덕여왕]]이 붕어하고 뒤를 이어서 국왕이 되기는 했지만 애당초 선덕여왕이 진덕여왕을 [[후계자]]로 지명한 것 같지는 않아보여 일각에서는 선덕여왕이 난리통에 죽고 [[태종 무열왕|김춘추]]와 [[김유신]]이 진덕여왕을 국왕으로 추대한 게 아닌가라고 보기도 한다.[* [[왕위]]에 오를만한 [[성골]]이 사라진 상황이었기 때문에 김춘추가 오를 수도 있었지만 전통과의 급격한 단절로 인한 혼란을 우려한 탓인지 어떻게든 성골을 찾아서 어거지로 왕으로 세운 듯한 느낌이 있기는 하다. 하필 왕위 계승 [[서열]] 2위였던 [[비담]]이 난을 일으킨 상황도 의미심장하다.] 훗날 김춘추 본인 역시 진덕여왕이 후계자로 직접 지명받은 것이 아니라[* 다만 《삼국유사》에서는 648년의 김춘추가 [[동궁]](東宮)([[태자]])에 해당하는 신분이었다고 쓰고 있어서 이미 진덕여왕의 후계자로 내정된 상태였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화백회의]]의 추대로 즉위했다고 말했다. 아니면 진덕여왕을 후계자로 지정하고 가뜩이나 [[여왕]]에 반대하던 비담 세력은 또 여왕이 즉위한다는 점에 거부감을 느껴 '''여주불능선리'''[* 女主不能善理. 여왕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 비담의 난의 명분이었다.]를 내세워 진덕여왕의 즉위를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고 해석도 가능하다. 비담의 난 발발 직후에 선덕여왕이 [[죽음|사망]]한다는 점에서 이미 반란 직전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비담의 난 진압으로 반 김춘추 세력이 [[숙청]]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진덕여왕의 치세에서 실권은 김춘추와 김유신에게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알천]]이 [[상대등]]이 되고, [[대아찬]] 수승을 우두주[* 오늘날의 [[강원도]] [[춘천시|춘천]], [[철원군|철원]] 일대.]의 [[군주(동음이의어)#s-3|군주]](軍主)로 임명하는 등 비담의 난으로 야기된 혼란을 수습하고 치세를 시작했지만 역시나 선덕여왕 때처럼 [[백제]]와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신라는 워낙 많이 패배하다 보니 당시 [[일본]]에서도 신라를 우습게 볼 정도였다. 즉위 직후인 647년에는 김춘추가 [[외교]]적 고립을 타파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지만[* 《[[일본서기]]》에만 관련 기록이 있다.] 일본은 이미 백제와의 [[동맹]] 관계가 굳건한 나라였기에 잘 되지 않았다. 당시 신라 최고의 거물인 김춘추가 직접 [[바다]]를 건너갔다는 점에서 신라가 대충 찔러본 게 아니라 상당히 기대를 갖고 갔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일본의 정세를 살펴보면 김춘추가 건너가기 직전인 645년에 친백제계 가문인 [[소가]]씨가 몰락하는 [[다이카 개신]]이 일어나는데 [[김현구]]의 견해에 따르면 이때 소가씨를 몰락시키는데 큰 활약을 한 [[나카토미노 카마타리]](中臣鎌足, [[후지와라]]씨의 시조)가 상대적으로 친신라파였다고 보기도 한다. >겨울, 감질허(邯帙許)를 사신으로 보내어 당에 조공하게 하였다. 당 태종이 어사를 시켜 “[[신라]]는 신하로서 대국을 섬기면서 어찌하여 따로 연호를 칭하는가?” 라고 물었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덕여왕 2년(648년) 겨울. 즉위 이듬해인 648년에는 [[당나라]]에 감질허, [[김춘추]] 등을 [[사신]]으로 파견했다. [[태종(당)|당 태종]]은 감질허를 사신으로 보낼 때만 해도 까칠했지만 김춘추가 오자 반갑게 맞아들이며 여러가지 요구도 들어주는 태도를 보였다. 이는 예전 선덕여왕 때 신라는 [[여자]]가 왕이니까 그 꼬라지라고 무례하게 행동했던 것과 다른 모습인데 결국 김춘추와 [[회담]] 결과 적극적으로 동맹을 체결하여 [[나당연합군|나당 동맹]]의 기초가 이뤄졌다. 당 태종이 나당 동맹에 적극적으로 임한 것은 645년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패퇴했던 것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한 번 [[실패]]를 겪은 당 태종이 고구려 재침략을 위해서는 고구려의 후방을 노릴 수 있는 신라와의 [[협공]]이 꼭 필요할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645년 고구려 침공 당시 당 태종은 동맹국이었던 백제, 신라에게 모두 지원군 [[파병]]을 요청했는데 신라가 당나라의 요청에 응해서 원군을 파병했지만 '''백제는 이전부터 당나라가 고구려를 친다면 지원군을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제가 말을 바꾸어 지원군을 파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당나라를 지원하고 있던 신라의 옆구리를 [[빈집털이]]했다'''. 백제의 태도에 큰 분노를 느낀 당 태종은 죽을 때까지 백제의 사신을 받지 않았고[* 백제가 [[중국]]에 고구려 좀 공격해달라고 징징대다 정작 진짜로 중국이 고구려를 치면 나몰라라 하고 강 건너 불구경하던 것은 이미 100년쯤 전인 [[수나라]] [[문제(수)|수 문제]], 백제 [[위덕왕]] 시절부터 시작해 여러 번 있었다.] 당나라의 목표인 고구려 [[멸망]]에 백제가 걸림돌이 되니 고구려를 치려면 [[방해]]가 되는 백제를 먼저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신라 역시 당나라를 제외한 모든 주변국(고구려, 백제, 일본)이 신라를 적대하는 외교적 고립을 타파하기 위해 당나라와의 외교 강화로 반 신라 [[연합]]에 대응하고자 했다. 진덕여왕은 직접 [[비단]]에 수를 놓고 [[시]]를 지어 당나라에 바쳤는데 바로 <[[치당태평송]]>이다. [[아첨]]이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울 지경이라서 일각에서는 진덕여왕이 무슨 [[치어걸]]이라도 한 거냐고 [[비판]]하기도 한다. >대당 (大唐)은 큰 왕업(王業)을 개창하니[br]大唐開鴻業 >높디높은 황제의 포부 빛나도다.[br]巍巍皇猷昌 >전쟁을 그치니 천하가 안정되고[br]止戈戎衣定 >전 임금 이어받아 문치(文治)를 닦도다.[br]修文繼百王 >하늘을 본받음에 기후가 순조롭고[br]統天崇雨施 >만물을 다스림에 저마다 빛나도다.[br]理物體含章 >지극한 어짊은 해 달과 짝하고[br]深仁諧日月 >시운(時運)을 어루만져 태평으로 나아가네.[br]撫運邁時康 >깃발들은 저다지도 번쩍거리며[br]幡旗旣赫赫 >군악 소리 어찌 그리 우렁찬가![br]鉦鼓旣鎤鎤 >명을 어기는 자 외방(外方) 오랑캐여[br]外夷違命者 >칼날에 엎어져 천벌을 받으리라.[br]剪覆被天殃 >순후한 풍속 곳곳에 퍼지니[br]淳風凝幽顯 >원근에서 다투어 상서(祥瑞)를 바치도다.[br]遐邇競呈祥 >사철이 옥촉(玉燭)처럼 고르고[br]四時和玉燭 >해와 달은 만방을 두루 도네.[br]七曜巡萬方 >산악의 정기 어진 재상 내리시고[br]維嶽降宰輔 >황제는 신하를 등용하도다.[br]維帝任忠良 >삼황오제(三皇五帝) 한 덕(德)을 이루니[br]五三成一德 >길이길이 빛나리 우리 [[당나라]].[br]昭我唐家皇[* 원문은 昭我唐家光(소아당가광)이다. 이 시는 5언시로 2-3으로 끊어 읽어야 한다. 다른 모든 구절은 2-3으로 끊어 해석하였으나 해당 부분만 1-4로 해석을 하였다. 2-3으로 해석을 한다면 "우리에게 비추리라, 당나라의 빛이여!" 라는 뜻이 된다. 전후 문맥상으로 봐도 이 해석이 타당하지 않을까?] 당시 신라의 사정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추측할 수 있다. 물론 지금에 와서야 굴욕적으로 보이겠지만, 백제와 고구려라는 강력한 외세에 나라가 [[풍전등화]]인 상황에서 외교를 통해 [[국가]]와 [[왕조]]를 보전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지 결코 치욕이 아니다. 그리고 현대인이 보기에는 지나치게 비굴해 보이는 이런 어법은 현대 이전의 [[동아시아]]에서 강대국인 [[중국]]과 교류할 때 다들 하는 관행에 가까웠다. 지금의 기준으로 역사를 함부로 재단하는 것이 얼마나 큰 오류인지를 알 수 있다. 그러기에 E. H. Carr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 없는 대화'라고 하지 않았는가! 《삼국사기》와 《수서》 <동이전>에 의하면 고구려의 [[영양왕]]이 [[고구려-수 전쟁|수나라의 침입을 물리친 후]] 화해를 요청할 때[* 이겼는데 뭔 화해냐 싶겠지만 이래봐도 수나라는 위진남북조시대를 정리하고 중국 역사상 최대의 성군 중 하나인 수문제의 치세였다. 일단 한번 싸워 이기긴 했다만 '''다음에도 이길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즉 일단 들어온 침공은 이겨낸 뒤 형식적으로나마 사과를 하여 체면을 세워주는 것으로 재침공의 요소를 막는 것이 최선이다.] 스스로를 '요동 [[똥]][[땅]]의 신하'(遼東糞土臣某)라고 자칭하면서까지 사죄하는 문서를 보냈고, 《[[위서]]》에 전문이 실린 백제 [[개로왕]]이 [[북위]]에 고구려 공격을 요청할 때 보낸 국서에서는 '백제 공주를 (북위에 보내) [[후궁]]을 청소하게 할 수도 있다'라고까지 했다. 이는 당대의 사정을 보지않으면 굴욕 외교로 보이겠지만 고구려나 백제가 중국에 보내는 외교 문서에서 나오는 표현들도 <치당태평송>의 구절들의 수위에 못지않았다. 특히 전후 사정을 보면 세 나라 모두 진심 따윈 없이 중국에게서 외교적 이득을 얻기 위해 말 뿐인 외교적 수사였을 뿐이다. 아니 나라가 망할 판인데 뭔 짓을 못하겠는가? 굴욕적이라고 해도 말로만 굴욕을 겪는 것이 진짜로 적 앞에서 무릎 꿇고 조아리는 것보단 낫다. 당장 동시대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에서 [[박쥐]]놀음 하다가 망한 백제가 있지 않은가? 결과적으로 신라가 [[삼국통일]]을 해서 그렇지. 당시 신라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이미 선덕여왕 시기에 [[대야성]]이 [[대야성 전투(642년)|무너져 압량주가 최전선이 되었는데]] 이것을 현대 대한민국에 비유하면 [[연천군]], [[철원군]] 다 뚫리고 [[동두천시]]가 최전방이 된 격이다. 심지어 김춘추가 즉위하고도 고구려와 백제, [[말갈]]이 연합한 대군의 침공으로 신라는 30여 개의 성이 함락되었다. 당시 김유신은 [[수도(행정구역)|수도]]인 경주가 위협받을 때마다 필사적으로 싸워 개별 전투에서는 승리해 지켜냈지만[*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본기>와 <김유신 열전>의 분위기가 상이하게 다른데 <김유신 열전>만 보면 외침은 있어도 그걸 다 김유신이 물리쳐내어 별 문제 없어보이지만 <신라본기>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나온다. 애초 <김유신 열전>은 김유신만 다룬 만큼 김유신의 활약만 나와있다. 즉 두 자료를 교차검증해 보면 신라는 김유신이 있는 전선에서는 공세를 막아내지만 김유신이 없는 곳에서는 속절없이 밀리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김유신이 유능해도 전체 전선을 다 커버할 순 없으니[* 이는 초한전쟁의 초나라 상황과 유사한 것으로 초나라는 항우가 있는 곳에서는 [[해하 전투]]를 뺀 모든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항우가 없는 곳에서는 족족 밀렸다. 신라 역시도 이 때의 초나라와 비슷한 신세였다. 그러나 신라는 초나라와는 달리 [[당나라|도움을 청할 나라]]가 있었다는 점이 초나라와 달랐다.] 신라가 저런 저자세로 나오는 것도 당연한 일] 양면 [[전쟁]]에서 신라의 한계는 분명했다. 일본에 대해서도 김춘추가 직접 건너간 것 이후, 적극적으로 사신을 파견해 외교를 통한 상황 타개를 노리기도 했다. 652년 6월, 653년 4월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일본서기》에 남아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조정에서는 "어차피 신라는 곧 망할 나라인데 우리가 도와줘서 뭐합니까? 우리가 전력을 안 써도 먹을 수 있습니다. 상황을 보다가 신라가 망할 때가 되면 우리가 낼름 먹어버리죠"[* 《일본서기》 권25 고토쿠 천황 652년 6월 기사.]라는 반응이었기에 별다른 소득을 거두지 못했다. 사실 당시 일본의 판단은 객관적으로 나쁘지 않았는데 신라는 당나라가 고구려, 백제와의 전쟁에 참전하기 전까지 백제와 고구려 연합 공격에 30여 개의 성을 잃었다. 어떻게 봐도 신라는 외교적 고립과 군사적 공격에 무너져 가고 있었던 것이 맞다. 문제는 예상과 달리 당나라가 방침을 바꿔서 고구려보다 백제를 먼저 멸망시키기 위해 10만명 단위의 대군이 [[황해]] 바다를 가로질러 참전했다는 것이다. 신라의 [[도박]]과도 같은 카드가 통한 것이다.[* 당나라가 상당히 간을 보고 있었다. 선덕여왕때는 모욕을 주더니 진덕여왕 때 군사동맹을 맺고 태평송을 받고 기뻐하고 신라가 백제와 전투에서 승리 보고를 받고는 계산이 얼추 맞아서 그런 지도 모른다.] 기왕에 비담의 난으로 [[귀족]] 세력이 약화된 이상 [[왕권]]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중국의 제도를 대거 도입해 왕권을 강화하게 된다. [[진지왕]]의 폐위에서 알 수 있듯 진덕여왕 이전의 신라는 국왕과 귀족의 관계가 뚜렷한 상하 관계가 아니었고 상호 견제가 강했지만, 이 시기부터 [[진골]] 귀족에게 신하의 상징물인 [[홀#s-2.1|아홀(牙笏)]]을 갖고 다니도록 했고(650년)[* 신하들이 들고 다니는 길쭉한 [[상아]] 재질의 막대기. 이후 고려, 조선에서도 계속 사용한다.], 새해에 국왕에게 [[충성]] 서약을 하는 신정 하례를 시작하기도 한다(651년). [[시랑]](侍郞)이라는 [[벼슬]] 이름을 처음 사용한 것도 이 시기부터이다. 이런 제도들이 [[고려]], [[조선]]까지 천수백 년을 계속 이어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진덕여왕 시대에 바뀐 부분들이 [[한국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셈이다. 진덕여왕은 비록 존재감이 약했지만 그녀의 시대는 뚜렷한 존재감을 나타냈다. 그뿐만 아니라 신라 [[중앙]]집권 체제의 기반이 되는 [[집사부]]가 설치된 것도 진덕여왕 때이다. 물론 이런 [[개혁]] 대부분은 사실상 실권을 쥐었던 김춘추의 주도로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