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덕여왕 (문단 편집) == 개요 == [[신라]]의 제28대 [[국왕]]. 즉위 전 이름은 [[승만공주]]. [[진평왕]]의 둘째 남동생 [[김국반|국반(國飯)갈문왕]]의 딸로 어머니는 [[월명부인]] 박씨였다. [[연호]]는 '태화'(太和). [[진평왕]]의 동생인 [[국반 갈문왕]]과 [[월명부인]] 사이에서 태어났으므로 제26대 진평왕의 조카였으며, 제27대 [[선덕여왕]]의 사촌 자매였다. 신라 3대 여왕[* 제27대 [[선덕여왕]], 제28대 진덕여왕, 제51대 [[진성여왕]].]들 중 1명이다. 다른 두 여왕과 마찬가지로 진덕여왕도 [[삼국사기]]에서는 '[[女|여(女)]]' 자가 빠진 '진덕왕'(眞德王)이라고 기록되어있다.[* 삼국사기에서는 그냥 '진덕왕'인 반면 [[삼국유사]]에서는 '진덕여왕'으로 표기된다.] [[한국사]]와 [[세계사]]를 막론하고 역사상 [[여왕]]은 예외적인 사례이기 때문에 구분을 위해 여왕이라 부르는 것이 보통이다. 그가 즉위한 것은 마지막으로 남은 [[성골]] 혈통이었기 때문이며[* 다만 승만공주가 어째서 성골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 [[실세]]였던 [[태종 무열왕|김춘추]]가 선덕여왕의 죽음으로 상심에 빠진 [[백성]]들을 추스르기 위해 그 대신이 될만한 여왕으로 승만을 추대했다는 설도 있고, 아예 김춘추와 [[김유신]]이 짜고 [[비담의 난]]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 승만공주를 [[허수아비]] [[여왕]]으로 추대한 후 [[정권]]을 잡았다는 주장도 있다. 다만 정설은 아니므로 너무 맹신하지 말 것. 그녀가 성골인 정설은 진평왕의 아버지인 [[동륜태자]]의 자손만을 성골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쪽 가문의 유일한 자손을 왕위로 밀었다고 보는게 맞을 것이다.] 그녀가 사망하면 더이상 성골이 없으므로[* 진덕여왕의 출생 시기가 알려지지 않아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진평왕이 살아있을 때 임신이 가능한 나이었다면, 성골인 진평왕과의 사이에서 성골을 낳을 수 있었다. 신라는 근친혼이 빈번했으니..][* 자식도 없었고 자식이 있었다해도 성골 [[남성]]이 없으므로 아이의 아버지는 [[진골]] 이하일테니 김춘추보다 [[골품]]이 높다고 할 수도 없다.] 진골에게 [[왕위]]가 넘어갈 것이 [[암묵의 규칙]]으로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던 상황이었으므로 진덕여왕 재위 기간의 정치적 실권은 비담의 난 [[토벌]]로 [[비담]]파 [[귀족]] 세력을 제압한 [[김유신]]과 차기 왕위 계승의 유력한 후보였던 [[김춘추]]가 주도하는 세력이 사실상 잡고 있었다. 아직 [[알천]]을 중심으로 한 알천파 귀족들이 남아있었지만 이들도 김춘추파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성향은 아니었다. 이 시기를 기준으로 신라 사회를 [[전기]]와 [[후기]]로 나눠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개혁]]이 있었는데 대부분은 차기 국왕이 거의 확실했고, [[섭정]]에 해당하는 김춘추의 의도대로 진행된 것으로 보이며 많은 연구서들이 진덕여왕이 왕으로서 실질적인 [[통치]]는 거의 하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태종 무열왕|김춘추]]와 [[김유신]]의 이른바 [[바지사장]]에 불과했다. 《[[삼국유사]]》에서 [[음갈문왕]]과 [[혼인]]했다고 하는 선덕여왕 및 [[김위홍]]과 [[혼인]]했다고 하는 [[진성여왕]] 달리 진덕여왕의 [[국서]]([[남편]])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진덕여왕이 즉위한 시점에는 더 이상 성골 남성이 [[근친]]까지 다 포함해도 없기 때문에 혼인을 하지 않은 게 아니라 하지 못했다는 연구도 있다. [[김서현(신라)|김서현]]과 [[만명부인]], [[태종 무열왕|김춘추]]와 [[문명왕후|문희]]의 일화에서 나오듯 같은 골품끼리도 [[가문]]의 격이 차이가 나면 [[역사]] 기록에 남을 [[에피소드]]를 만들 정도로 특이한 경우가 아닌 이상 혼인하기가 어려웠는데 성골과 하위 골품 간의 혼인은 어려우면 어려웠지 쉬웠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사실 《[[동경잡기]]》 간오(刊誤)에 '진덕여왕의 남편은 갈문왕(葛文王) 김기안(金基安)이다.'라는 기록이 있지만[* 출처는 충남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김수태(金壽泰)의 1997년 논문 '有懷堂 權以鎭의 「東京雜記刊誤」'에서 나온 내용이다.[[http://db.history.go.kr/id/hb_102_02_000267|#]]] 《[[동경잡기]]》는 19세기 기록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부족하다. 신라 중고(中古)기 왕가 인물들이 그렇듯 진덕여왕의 이름 '승만'(勝曼) 역시 [[불교]] 세계관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불교에서 승만부인은 [[석가모니]]로부터 장차 [[성불]]해 보광여래가 될 것이라는 수기를 받은 여성으로 [[불경]]인 《승만경》의 [[주인공]]이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진흥왕]]부터 시작된 신라 왕가=석가족(샤카족) 관념과 그에 바탕을 둔 성골 관념을 배경으로 즉위했으며 그렇게 즉위한 마지막 왕이다.[* 다음 왕이자 최초의 [[진골]] 출신 왕 김춘추부터는 왕의 이름도 [[유교]]적인 이름으로 바뀐다. 신라 [[상대]]와 달리 [[중대]]~[[하대]] 왕들은 성이 [[김씨]]인 것까지 겹쳐서 현대 [[한국인]] 이름이라 생각해도 어색하지 않은 어감인 이름이 많은데 유교적 사회의 [[작명]]법이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가까운 시대 사람인 진평왕의 후비 [[승만부인]]과는 다른 사람이다. 성도 승만부인은 [[손(성씨)|손씨]]이고, [[한자]]도 승만부인은 '승만'(僧滿)이며, 진덕여왕의 휘는 '승만'(勝曼)으로 다르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도 '승만'(承晩)으로 다르다. '젊고 아름다운 여왕'에 대한 [[로망]] 때문인지 [[드라마]] <[[대왕의 꿈]]>에서도 당시 30세였던 [[손여은]]이 진덕여왕 역으로 출연했는데 사실은 진덕여왕이 즉위 당시에 30대 초반 이하의 젊은 [[여성]]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진덕여왕은 국반 갈문왕의 딸인데 국반 갈문왕이 형인 진평왕과 몇 살 [[터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버지인 [[김동륜]]이 572년에 사망했으므로 국반 갈문왕을 김동륜의 [[유복자]]라고 가정하더라도 진덕여왕이 즉위한 647년에는 살아있었다 치면 76세가 된다. 그러므로 그런 국반 갈문왕의 딸인 진덕여왕도 즉위할 당시에는 아무리 적어도 40대 후반~50대 전반의 [[중년]] 여성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고 10대 중후반이 결혼 적령기였고, 빠르면 30대 정도에 손자, 손녀를 보기도 했던 시대에 이 정도면 [[할머니]]로 불릴 연령대였다.[[https://shindonga.donga.com/3/all/13/100572/1|#]] 연령대로는 선덕여왕도 마찬가지였는데 [[한국]] 역사상 확실하게 젊어서 즉위한 여왕은 제51대 진성여왕 1명뿐이다.[* 아름다운 여왕이었는지는 몰라도 최소한 연령대는 젊은 여왕이었다. 즉위할 당시 나이는 10대 후반~20대 전반이었고, 10년 재위한 뒤에 조카 [[효공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니까 말이다.] 기록에 의하면 자태가 풍만하고[* 여러 매체에서도 진덕여왕은 약간 살이 찐 통통한 모습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즉위했을 때의 진덕여왕의 연령대를 고려하면 [[나잇살]] 때문에 살찐 모습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아름다웠으며 키는 7척[* 진덕여왕 때부터 당소척이 사용되었는데 1척에 24.5cm이므로 7척이면 약 172cm 정도다. 이 당시 여자 키가 172cm면 엄청난 [[장신]]이다.]에 이르러 팔이 무척 길어 [[무릎]] 밑까지 닿았다고 한다. 물론 이런 기록은 진덕여왕을 [[보살]]과 같이 묘사해서 그녀의 권위를 높이려는 의도였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또한 "팔이 길다"는 것은 [[덕]] 있는 이의 상징적인 [[클리셰]]이기도 하다. 《[[삼국지]]》의 촉한 소열제 [[유비]]도 키가 7척 5촌에[* [[후한]] 시절 1척의 길이는 23cm 혹은 23.7cm이므로 유비의 키는 173cm 혹은 178cm가 된다.] 팔이 무릎까지 내려간다는 묘사가 있다. 다만 체격이 크다는 묘사 자체는 사실일 수도 있는게 [[지증왕]][* 《[[삼국사기]]》에서는 그냥 체격이 크다고 했다.]이나 [[법흥왕]], [[진평왕]][* 《삼국유사》에 따르면 키가 무려 11척이라고 하는데 [[국제단위계|미터법]]으로 환산하면 253cm 정도다.], [[경덕왕]], [[진성여왕]], [[효공왕]] 등 [[경주 김씨]] 신라 왕가는 체격이 크다는 묘사가 있는 인물이 실제로 많은 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