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군 (문단 편집) === [[조예]] 휘하에서 === [[조예]]의 대에도 중신으로 대우받아 사공의 자리까지 올랐다. [[조진]]이 황제에게 표를 올려 촉을 토벌해야 한다고 몇 차례 진언하고 사곡으로부터 공격해 들어가려고 했다. 진군은 식량이 준비되지 않았고 사곡의 지세가 험난하다는 이유로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조예는 진군의 의견을 들었다. 이번엔 조진이 표를 올려 자오도로부터 촉을 공격하려고 했는데, 진군이 다시 표를 올려 시행하기가 불편하다고 말하고, 아울러 군사를 다루는 계책을 말했다. 조예는 조서를 내려 진군의 건의를 조진에게 주었고, 조진은 그의 건의에 따라 시행했다. 마침 며칠 간 장마가 내렸고, 진군은 조서를 내려 조진에게 돌아오도록 해야만 된다고 주장했으며, 조예는 진군의 의견을 따랐다. 조예의 딸 [[조숙(삼국지)|조숙]]이 병으로 죽자 시호를 평원의공주로 추증했다. 진군은 조예에게 여덟 살 이하의 어린애가 죽었을 뿐인데 어찌 한 달이나 장례를 치르면서 조정의 사람들에게 흰 옷을 입히고 아침 저녁으로 통곡하게 하냐고 상소를 올렸다. 조예는 듣지 않았다. 조예가 궁궐을 건축하여 백성들이 힘들어하자 진군이 궁궐공사에 대해서 상소를 올렸다. 진군은 우임금도 요순을 계승했지만 검소했다. 지금은 전란이 있은 이후로 백성들은 지극히 적어 한나라 문제와 경제때와 비교하면, 그 당시의 큰 한 군에 불과하다. 게다가 변방에는 일이 있어서 장수와 병사들은 수고로운데, 만일 수재나 한재의 근심이 있게 된다면 국가는 커다란 걱정이 있게 될 것이고 아울러 오와 촉이 아직 멸망되지 않았으므로 사직은 불안한데 궁궐 짓는건 중요한 일이 아니다. 옛날 유비가 성도에서 백수까지 역사를 만들어 많은 인력을 소모한걸 보고 위무제가 백성을 피곤하게 하는 짓이라고 비판했는데 똑같은 짓[* 유비가 왕을 칭한 후, 궁전과 관사를 짓고, 성도에서 백수까지 모두 4백곳에 관사 우정을 짓고, 대신들도 가만히 있지 않아서 백성들이 힘들어 했다.]하지 마시라고 했다. 조예가 왕자(王者)의 궁전은 응당 (오나라와 촉나라를 멸망시키는 것과) 더불어 진행해야 한다. 적을 멸망시킨 다음에는 다만 역을 면하고 지키기만 해야지 어찌 다시 요역을 일으키겠는가? 그러므로 이는 그대의 직무이자 [[소하]]의 큰 계략이다[* 호삼성은 '이 일은 소하가 미양궁을 건설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주석들 달았다.]라고 반박했지만 진군이 그것과는 경우가 다르다고 하며 '옛날 한고조는 단지 항우와 천하를 다투었는데, 항우는 멸망하고 궁실은 타버렸기 때문에 소하가 무고와 태창을 만들것을 건의하였던 것이며, 이런 것들은 모두 긴급히 필요한 것들이었지만, 한고조는 그것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짓는 것을 비판했습니다. 지금 두 적([[촉한]], [[손오]])은 평정되지 않았으니, 진실로 옛날과 똑같이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중략)'이라고 또 반박하자 조예는 궁전의 건축을 감소시켰다. 이 시기 [[부하(삼국지)|부하]]가 진군의 추천으로 관직에 오른다. 부하가 209년생이니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까지 인재 보는 안목이 탁월했던 것. 236년에 세상을 떠나자, 조예는 그의 공덕을 추모하고, 식읍을 분할하여 한 아들을 열후로 봉했다. 위서에 따르면 진군이 황제에게 상소할 때마다 그 초고를 없애버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군이 그렇게 간언하는지 모르고 진군은 침묵만 하고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진군 사후, 정시 연간(240년 ~ 249년)에 신하들이 올린 상서 중에서 명작(?)들을 뽑아서 공개했는데, 이때서야 신하들이 진군의 간언 내용을 볼 수 있었고, 모두들 경탄해 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