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경지 (문단 편집) === [[진경지의 북벌|북벌]] === 대통 초년, 북위의 북해왕 [[원호(북위)|원호]]가 [[선비(민족)|선비]]화한 [[갈족]]계 글호족 이주씨(爾朱氏)의 전횡(專橫)에 괴로워한 끝에 스스로 양나라에 망명하여 북위의 황위를 잇기 위해 힘을 빌려줄 것을 요청했다. 양무제는 이를 받아들이고, 진경지를 가절(仮節)-표용장군(飇勇將軍)에 임명하여, 원호를 북쪽으로 호송할 것을 명령했다.('''대통북벌''') 원호는 환수(渙水)에 이르러 위나라 황제(魏帝)의 호(號)를 칭하고, 진경지에게 지절(持節)-진북장군(鎭北將軍)-호군(護軍)-전군대도독(前軍大都督)의 지위를 제수했다. 양나라군은 질현(銍縣)에서 출발해 전진하여 형성(滎城)을 빼앗기 위해 곧 휴양(睢陽)에 이르렀다. 북위의 장군 구대천은 70,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9성을 나눠 쌓아 양나라군의 진격을 저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진경지는 이를 공격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3개의 요새를 함락시키고 구대천을 항복시켰다. 뒤이어, 북위의 정동장군(征東將軍)인 제음왕(濟陰王) 원휘업(元暉業)이 우림서자(羽林庶子)군 20,000명을 이끌고 양[* 梁; 하남성의 지명으로 왕조명이 아니다.]과 송[* 宋; 이것도 왕조명이 아니다.]의 땅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왔다. 원휘업은 고성(考城)으로 전진하여 주둔했는데, 고성의 사방(四方)은 물길이 있어 지키기 쉽고, 수비는 견고했다. 진경지는 물에 뜨는 방루를 쌓을 것을 명령하고는 이것을 이용해 그 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북위군의 원휘업은 생포되었고, 병량을 실은 마차 7,800량을 획득해, 대량(大梁)에 보냈다. 위제 원호는 진경지를 위장군(衛將軍)-서주자사-무도공(武都公)의 지위로 승격시켰다. 진경지는 곧이어 병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나아갔다. 북위의 좌복야(左僕射) 양욱(楊昱), 서아왕(西阿王) 원경(元慶), 무군장군(撫軍將軍) 원현공(元顯恭) 등이 어장우림종자서자(御仗羽林宗子庶子)군의 병사를 합쳐 70,000명을 이끌고, 형양에 주둔하여 원호와 진경지의 앞을 막아섰다. 북위의 병사는 정예였고, 성은 또 험준하고 견고해 진경지가 여러번 공격해도 쉽사리 빼앗을 수가 없었다. 북위의 장군 원천목(元天穆)의 대군이 얼마 있지 않아 도착했고, 표기장군(驃騎將軍) [[이주조]][* 爾朱兆, 권신 [[이주영(북위)|이주영]]의 조카였다.]가 거느리는 호기(胡騎) 5,000명, 기병 장수(騎將) 노안(魯安)이 거느린 하주의 보병, 기병(夏州步騎) 9,000명이 선봉으로 파견되어 양욱을 구원하러 왔다. 또 우복사(右僕射) 이주세륭[* 爾朱世隆, 권신 이주영의 사촌동생이었다.]도 파견되어, 서형주자사(西荊州刺史) [[왕비(북위)|왕비]](王羆)의 기병 10,000명이 호뢰관(虎牢關)에 주둔했다. 원천목은 이주조 등과 앞뒤로 형양 근교에 도착해 양나라군을 포위하니 그 병력이 무려 300,000명에 달했다. 양, 위 두 나라 군대의 깃발과 북소리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형양은 아직 빼앗지 않아, 양나라군의 병사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었다. 진경지는 말의 안장을 풀고는 여물을 먹이면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여기에 이르기까지 성을 빼앗고 땅을 얻어, 수입이 적지 않다. 그대들은 위나라 사람의 부모•형제를 죽이고, 위나라 사람의 자녀를 약탈해 그 수를 헤아릴 수도 없다. 원천목의 군사는 모두 이것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불과 7,000명이며, 적병은 300,000명에 이른다.[* 당시 북위는 내부 반란인 [[육진의 난]]에 시달려 혼란스러웠기에 300,000명이나 되는 군세를 모을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나, 진경지 휘하의 양나라군의 수가 10,000명을 넘지 않았음은 《양서》, 《남사》 뿐만이 아니라 《[[위서(역사책)|위서]]》, 《[[북사]]》의 <헌문육왕전>에도 보이는 것이다. 어쨌거나 진경지의 양나라 군대가 소수였음은 분명해 보인다.] 오늘 벌어질 일에 따라 생기는 길은 우리의 생존을 도모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들에게는 이민족의 기병과 평원에서 싸울 힘이 없다. 그래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있을 뿐이다. 반드시 눈앞의 성루(형양성)을 빼앗을 필요가 있다. 그대들에게는 망설이고 있을 짬이 없는 것이다. 어떻게든 스스로 사지로 들어가야만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진경지는 양나라 북벌군의 전 병력을 성을 공격하는 데 투입하여 동양(東陽)의 송경휴(宋景休), 의흥(義興)의 어천민(魚天愍)이란 장사가 성벽을 먼저 올라 뛰어넘어 성안으로 쳐들어가자 기어코 형양성을 함락시키고, 양욱을 사로잡았다. 곧이어 원천목이 이끄는 북위의 대군이 성을 포위했으나 진경지는 기병 3,000명을 이끌고 성을 베개삼아 맞서싸워 이들을 크게 격파했다. 노안은 진지 가까이에서 항복을 요청했고, 원천목과 이주조는 단신으로 도망쳤다. 형양에 있었던 북위군의 비축물을 접수하자 소, 말, 곡식과 옷 등이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진경지가 호뢰관으로 진군하자, 이주세륭은 성을 버리고 도망치고 말았다. 북위의 제10대 경종 [[효장제]] 원자유(元子攸)는 공황에 빠져 병주(幷州)로 도망쳤다. 임회왕 원욱, 안풍왕 원연명은 문무백관을 이끌고 부고(府庫)를 봉한 뒤 법가(法駕)를 정비하여 참칭 황제 원호를 맞이하고는 낙양궁 어전전(御前殿)으로 모셨다. 원호는 개원(改元)하고 대사면을 시행했다. 그는 진경지를 시중(侍中),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에 임명하고 10,000호의 식읍을 증봉했다. 한편, 북위의 대장군 상당왕 원천목과 왕노생(王老生), 이숙인(李叔仁) 등은 40,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대량(大梁)을 공격해 함락하고는 왕노생과 비목(費穆)에게 병사 20,000명을 나눠주어 호뢰관을 점거하도록 했다. 그들은 양, 송 2주(州)에 들어왔으나, 진경지가 기습을 가하자 모두 항복했다. 이때 원천목과 10여 기의 병사들만이 북쪽으로 도망쳤다. 양무제 소연은 몸소 칙서를 하사하여 진경지를 칭찬했다. 진경지의 휘하 병사들은 모두 하얀 옷으로('''白袍''') 치장하는 것으로 유명했고, 가는 곳마다 항복하거나 따르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래서 얼마 후에는 낙양에서 이런 동요까지 불려지게 되었다. >"이름난 사령관이나 대장이(名師大將) 굳게 지키더라도, 천병만마(千兵萬馬)의 대군이 있더라도 백포(진경지의 부대)를 피하라."[* 이 동요에서 유래한 사자성어가 바로 천군만마였다.] 진경지가 치현에서 출발하여 수도 낙양에 이르기까지 140일 동안 32개 성을 함락시키고, 47회의 전투에서 모두 이겨 그를 막을 적이 없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