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영성) (문단 편집) === 멸망 === 시황제가 죽고난 이후 진나라는 이세황제 [[호해]], 진왕 자영을 끝으로 통일 이후 '''15년 만에 멸망한다.'''[* 사실 진나라는 춘추전국시대를 끝내고 중국사에서 처음으로 통일을 했지만 당시 중국에서는 통일에 대한 사상 및 자신이 진나라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통일만 달성하면 칭송하는 풍조와 다르게 당시 지배층들이나 피지배층들이 승자인 진나라에게 불만을 가졌고, 여기에 진나라의 가혹한 압제로 불만이 더욱 커져 기회를 노리고 있었기에 반란이 시작되었다.] 중국사상 최초의 통일 왕조임과 동시에 가장 단명한 통일 왕조기도 하다.[* 단명한 국가들 중 [[서진]], [[수나라]]조차 통일 왕조였던 기간만 따지면 진나라의 2배다.] 시황제가 [[흉노]]를 막고자 [[만리장성]]의 축조에 들어갔고, 자기 무덤을 짓고, 도로를 만드는 등 거대하고 무리한 토목 공사를 일으켜 민심을 잃고 말았다. 진시황이 죽자 [[환관]] [[조고]]와 승상 [[이사(전국시대)|이사]]가 장남 부소를 제치고 호해를 황제로 옹립했는데, 조고는 황제의 권위를 등에 업고 온갖 악행을 벌였고 호해는 조고에게 정사를 맡기고 자신은 유흥에 빠지면서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여 민생을 도탄에 빠트렸다. 결국 기원전 209년 [[진승]]과 [[오광]]이 반란을 일으켜 장초라는 나라를 세웠다. 진승의 반란군은 파죽지세로 진나라 전역을 장악했고 진승의 부하들에 의해 육국이 부활했으며 심지어 주문이 이끄는 무리가 함곡관 앞까지 진군하기도 했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소부 [[장한]]이 나서 주문의 군대를 쳐부수고 장초를 짓밟은 뒤 되살아난 육국을 하나하나 제압했지만 그마저도 초나라의 장군 [[항우]]에 의해 막혔다. 장한의 군대는 기원전 207년 [[거록대전]]에서 항우에게 패배했고, 장한은 은허에서 항우에 항복했다. 한편 진군이 항우에 박살나고 있을 때 역시 초나라의 장수였던 [[한고제|유방]]이 이끄는 군대가 함양으로 들이닥치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모르던 호해는 모반을 꾀한 조고에 의해 시해당했고, 조고는 인망이 두터운 [[자영]]을 옹립했지만 자영은 조고와 그 일족을 멸문시켜버렸다. 하지만 이미 대세를 거스를 순 없었고 자영은 기원전 206년 유방에 [[전국옥새]]를 바치며 항복했다. 유방은 자영의 항복을 받아주고 주위의 간언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았으며, 진나라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군대를 함양 밖으로 물리고 진나라의 가혹한 법을 대체할 약법삼장을 반포하여 민심을 다독였다. 그러나 뒤늦게 관중에 입성한 항우가 자영을 죽이고 이듬해에 수도를 불태워 진나라는 멸망했다. 이후 항우와 유방이 가장 큰 군웅으로 떠오르면서 결국 [[초한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에서 유방이 승리하여 [[한나라]]를 건국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최초의 [[중화제국]]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를 다룬 소설이 바로 '''[[초한지]]'''.[* 진나라 때의 한 해의 첫 달은 단월(진시황의 정(政)과 겹쳐서 정(正)월이 단월이 되었다)이 아니라 10월이었는데, 진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자영이 항복한 달이 기원전 206년 10월이었다. 만약 시황제가 한 해의 첫해를 10월로 바꾸지 않았으면 진나라의 멸망연도가 기원전 207년이 되고 [[해하 전투]]가 기원전 203년으로 기록되었을지도 모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