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영성) (문단 편집) === [[춘추시대]] === 통일 이전에는 제후국 중 가장 서쪽에 위치한 변방국으로 시작했다. 진이 최초로 흥한 장소는 현재의 [[간쑤성]] 리 현 부근이며 현재 이 땅에서 진의 선조의 능묘라고 추정되는 것이 발견되어 주목을 받고 있다. [[춘추시대]]에는 수도가 옹[* 현재의 보계(바오지 시). 보계라는 이름은 [[당나라(동음이의어)#s-2|당나라]] 시절 붙었으며, 옛 이름 중 하나가 그 유명한 [[진창]]이다.]이었으나 [[전국시대]]에는 [[셴양시|함양]][* [[기원전 350년]]에 천도했다.]이 수도가 되었다. 본디 시작은 [[서융]]의 변방국이자 소국이었으나, 기원전 770년에 [[주나라]]가 견융의 침략으로 주 유왕이 살해당하고 도성을 동쪽으로 천도하는 과정에서 진양공이 [[진(희성)|진(晉)]]과 함께 가장 먼저 달려와 주 평왕을 호위한 공로로 [[백작]]위를 제수받으면서 제후의 반열에 오르고 융족이 점령한 주의 구지인 기(岐)에 봉해지게 된다. 이후 진양공은 영지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 견융족을 대거 공격했지만 사망할 때까지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수많은 군주들의 노력으로 끝내 옹주를 제패함으로써 실질적인 천승지국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이를 서융지패라고 하는데, 옹주를 평정하는 과정에서 진나라 국군(國君)이 몇 명이나 전쟁터에서 사망한다. 결코 그저 거저먹은 게 아닌 것.[* 실제로 진목공 당시 유여를 포섭하여 [[서융]]을 복속한 이후에도 서융은 계속해서 잔존하였고, 헌공이 완전히 안정시키기 전까지 서융은 상황에 따라 위수까지 넘봤다. 효공이 융 원왕을 죽이면서 거의 토벌된 것으로 보인다.] 진나라는 [[춘추전국시대]]에 들어가는 동시에 제후가 되었지만 풍속적으로는 중원 제후국과 크게 달라 야만스러운 나라로 여겨졌다. 위에서 언급하면서 진나라 제후들은 주로 [[서융]]과 항쟁함과 동시에 그들을 포섭해가며 영토를 확장했고 법률의 정비 등을 실시하여 나라의 기틀을 만들어 갔다. 전국시대의 [[순자]]는 진나라를 방문하고 방문기를 남겼는데, 그 묘사를 보면 개미굴의 느낌을 준다. [[순자]]가 감탄한 점은 엄격하게 집행되는 법률 아래서 각 백성들이 불평없이 각자 맡은 일을 척척 한다는 것인데, 순자는 어디까지나 유자였기 때문에 [[순자]]가 든 유일한 진나라의 단점은 유학자들이 없다는 것이었다. 민족적으로 봐도 진나라의 반은 [[서융]]의 이민족이었으며[* [[서융]]은 시대마다 다른 민족을 칭했는데, 진나라에서 부르던 서융은 [[티베트]] 계통이었으며 현 중국의 소수민족 [[강족]]과 [[이족]]의 선조였다고 한다.] 이렇게 이민족과의 부단한 투쟁 및 사방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군국주의]]적인 분위기가 나라에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목공 시절에는 오랜 전란에 시달린 중원에서 많은 인구가 유입되면서 그중 백리해와 건숙을 등용하여 국력을 착실히 키워나갔고, 서쪽에 치우친 위치 때문에 중원의 제후국들에게는 크게 인정받지는 못했으나 [[서융]]에서 신하로 일하던 유여를 포섭하여 그가 건의한 방법으로 서융의 여러 부족들을 복속시켜 서방의 패자로 군림하였다. 목공은 진(晉)나라의 내전에 두 차례나 개입하여, 결국 진 혜공을 사로잡은 후 영토를 뺏고 후에 그의 아들이 진(秦)나라를 거스르니 폐위시키고 진 문공(晉文公)을 '''연상의 사위'''로 맞아들인 후 진(晉)나라 군주로 세워 친선 관계를 유지한다. 이후 진(晉)나라와 힘을 합하여 반역으로 쫓겨난 주 양왕을 복권시켜 주 왕실을 보위하는 등 춘추시대 최고의 리즈시절을 맞는다. 그러나 중원 진출을 노리는 진(秦)나라는 중원으로의 길목에 위치한 진(晉)과는 자웅을 가릴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이미 진 문공의 사후, 진(晉)과 진(秦)은 적대 관계로 돌아섰고, 이 대립 관계는 진(晉)이 멸망하고 삼진(三晉)으로 불리는 [[조나라#s-2|조]], [[위나라#s-3|위]], [[한나라#s-1.1|한]]이 일어선 후까지도 계속되었다. 진(晉)의 국력이 유지되는 동안 진(秦)나라는 중원에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진(晉)은 춘추시대의 사실상의 패자나 다름없는 위치였고 그러다보니 진(秦)은 춘추시대에는 그다지 힘을 쓰지 못했다. 진 문공 사후, 두 진은 일진일퇴의 싸움을 거듭한다.] 진 목공 시절 얻었던 하서 지방을 다시 빼앗김으로 인해 하동과 하서지방의 영유권, 즉 황하 유역을 진(晉)나라가 꽉 쥐고 있었고 따라서 영토는 위수 지역에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진 문공 사후 벌어진 효산 전투에서는 전군이 몰살당하는 등 진(秦)나라 입장에서는 대참사를 겪었으며 3년 뒤에 벌어진 전투에서 또 졌고 이후 마지막으로 벌어진 복수전도 배수진을 친 진(秦)의 예기를 피해 진(晉)이 한 발 물러난 듯한 기록의 전투라 사실상 정신승리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진 목공도 미개한 관습이었던 [[순장]]을 없애지는 못해 진 목공 사후 대규모의 [[순장]]으로 인해 인적 인프라를 상당수 상실하게 된다. 그럼에도 훗날 관중이라고 불리는[* 당시에는 [[함곡관]]이 없었음을 기억하자.] 위수 인근의 비옥한 황토 지대는 어디 가는게 아니었고 외부의 침략도 외부로의 침공도 없이 수백 년간[* 진 목공 사후 역사에서 한 발짝 물러난 듯한 진은 200여 년간 지도자의 교체를 제외한 별다른 기록이 없고, 진 애공 시절 멸망 직전의 [[초(춘추전국시대)|초나라]]에 원군을 보낸 기록 정도만이 주목할 만한 기록이다.] 진(秦)은 착실히 국력을 쌓아나간다. 참고로 훗날 대립하게 되는 [[삼진(전국시대)|삼진]]의 [[조(전국시대)|조]] 왕실도 영성 조씨로 시조가 조보다. 조보의 장남의 후손이 진나라, 조보의 차남의 후손이 조나라다.[* 이 문단은 앞선 문단의 설명과 배치된다. 앞 문단에서 서술한 대로면 진의 시조인 비자는 비렴의 장남 악래(오래)의 후손이고 조보는 비렴의 차남 계승의 후손이니 한 집안이라고는 할 수 있어도 조보가 공통 조상일 수는 없는 것. 물론 고대의 족보인 만큼 출전마다 세부 내용이 조금씩 다른 건 어쩔 수 없긴 하다. 아무튼 ~~피터지게 싸우고 또 싸운 나머지 [[장평대전|포로 40만 명을 갱살하기까지 한]]~~ 진나라와 조나라가 [[소호]]의 후손을 자처한 영성 조씨로 같은 계통이라는 점은 당대인들도 인식은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