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지학순 (문단 편집) === 1980년대 행적 === 민주화 운동가로서 지학순 주교의 명망은 [[하나회|신군부]]의 5공정권이 등장한 후에도 여전했다. 1982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의 주동자들도 원주로 도피해서 지학순 주교를 만나기를 원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랬다. 그런데 5공화국 시절의 지학순 주교는 민주화 운동사에서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70년대 그렇게 열렬하게 유신독재와 맞섰던 지학순 주교는 비록 적극적으로 5공과 협력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5공에 대한 태도는 확실히 유신 정권과는 달랐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유신 때 [[박정희]]와 정면으로 맞섰지만, 5공 전두환 정권에서의 태도가 묘하게 유화적이거나 협조적이었던 네 사람, 즉 [[윤보선]] 전 대통령, [[천관우]], 지학순 주교, [[강원용]] 목사를 가리켜 윤천지강이라 부르게 된다. 지학순 주교가 5공 시절에 민주화 운동에서 다소간 멀어지게 된 원인은 여럿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가장 큰 것은 그의 건강. 당뇨로 인해 1980년대 내내 고생했던 것을 감안한다면 전면에 나서 활동하기 힘들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의 [[반공]]주의 성향이다. 5.18 광주학살을 겪으면서 1980년대 반독재 민주화운동 진영이 과거보다 훨씬 더 왼쪽으로 좌경화, 급진화했다는 것은 명백했다. 그리고 반독재민주화 투쟁진영을 좌파로 볼 수도 없고, 좌·우파가 복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파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북한]]과 공산주의 세계는 전체주의 독재사회로 타파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공산당을 피해[* 천주교도 북한의 박해를 심하게 겪었다. 개신교는 [[칠골교회]] 같은 어용 시설에서 형식적인 예배라도 하지만, 천주교는 북한에서 전멸했기 때문에 상주하는 사제가 없어서 어용 미사도 제대로 못 하고 있다.] 남쪽으로 온 지학순 주교의 과거를 감안한다면[* 그 유신 치하에서도 <내가 겪은 [[공산주의]]>라는 저서를 출간했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과 거리가 멀어진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사실 고령으로 인한 건강 악화와 반공성향은 윤천지강 4인 모두에게 해당된다. 이들이 1980년대 공통적으로 민주화 운동 일선에서 멀어진 건 어떻게 보면 필연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관심사가 달라진 점인데, 1985년 9월 남북 고향방문단 상호 방문([[이산가족]] 상봉)이었다. ---- > "[[평양]]을 방문한 50명의 이산가족 중에는 [[천주교 원주교구]]장을 지낸 지학순 주교가 포함돼 있었다. 그는 1950년 1월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 북한을 탈출한 이후 35년 만에, 북한에 살고 있던 누이동생을 만났다. 6남매 중 넷째와 다섯째로 특히 정이 깊었던 두 남매는 예순을 넘겨 다시 만나 부둥켜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두 남매 사이에 대화가 진행되면서, 누이동생은 안내원의 눈치를 보더니 성직자인 오빠를 향해 엉뚱한 말을 쏟아냈다. [[주체사상|“우리는 살아서 천당 가는데, 오빠는 죽어서 천당을 간다니 돌았구만요.]] [[세뇌|이곳이 천당인데 천당을 어디에서 찾겠다는 거야요?”]] 오빠는 [[정치범수용소/북한|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여동생의 처지]]를 헤아렸지만, 또 한 번 마음으로 울 수밖에 없었다. 이 일화는 이산가족 문제를 순수한 인도주의적 차원이 아닌, 체제에 균열을 일으킬 수 있는 민감한 정치적 사안으로 간주하는 북한 정권의 속셈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북한은 상봉에 내보낼 북측 가족에게 철저한 사상교육을 시키고, 상봉 이후에도 심적 동요를 막는 데 주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http://kookbang.dema.mil.kr/kookbangWeb/view.do?parent_no=1&bbs_id=BBSMSTR_000000000128&ntt_writ_date=20151102|국방일보 정훈자료]] ---- 이 방문 이후 충격을 받아 지병인 당뇨가 더욱 악화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후로는 사회운동 대신에 사회복지나 장애인 운동으로 더 관심을 두게 된다. 그렇다고 민주화 운동에 관심을 완전히 끊었다거나 [[전두환]]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것도 아니다. [[5.18 민주화운동]] 직후 윤공희와 함께 선처를 호소하기도 했다.[* [[전두환]]이 [[제1보병사단|제1사단장]]이던 당시 [[군종장교]]였던 정인준 신부가 가교 역할을 했다. 처음에 전두환은 정인준을 '지학순 꼬붕'이라며 마음에 안 들어했지만 나중에는 [[국군기무사령부/사령관|보안사령관]]으로 진급하자 군종실을 신설해 정인준을 데려갈 정도로 정인준을 아꼈다고 한다.] 원주교구 관내에서 일어난 [[사북사건]]을 원만히 수습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나자 [[김수환]] 추기경 등과 추모 미사를 집전하고 국민추도회에 참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