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지학순 (문단 편집) === 반유신 활동 === >이른바 유신헌법은 민주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고, 국민의 의도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폭력과 공갈과 국민 투표라는 사기극에 의해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다. ---- [[천주교 원주교구]]장으로 임명되기 직전이 그 유명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던 무렵이었고, 그 모습을 직접 본 영향인지, 혹은 당시 40대 중반의 젊은 주교였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지학순 주교는 열정적으로 사업을 전개했다. 대표적인 것이 [[원주교구]]가 40%의 지분을 후원하면서 창설된 원주문화방송이며, [[김지하]]나 [[장일순]]의 후원자도 지학순이었다. 그러나 원주문화방송은 60%의 지분을 가진 [[정수장학회|5.16장학회]]의 부패로 인해 운영이 엉망이 되었고[* 방송장비를 구매한다는 명목으로 [[천주교 원주교구]]에 바가지를 씌웠고 공금을 횡령했다. 탈세도 서슴지 않았다. 이에 원주교구가 감사를 요구하자, 5.16장학회은 본인들의 지분을 다른 종교에 넘기겠다며 되레 지학순 측을 협박한다. 지학순은 5.16장학회의 실질적인 소유주인 [[박정희]]에게 진정서를 제출했지만 별 반응이 없었다.], 분개한 지학순 주교는 1971년 사회정의 실현과 부정부패 고발을 선언하며, 원주문화방송의 운영을 규탄하기에 이른다. [[한국 천주교]]가 처음으로 사회 운동에 개입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지학순 주교의 활동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72년 국제사면위원회 한국이사장이 되었고, [[한국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도 맡아 활동하며 유신 정부와 싸우기 시작했다. 박형규, 김지하, 조화순 등 반정부 인사를 자주 원주로 불러 시국을 논의했다. 그런 결과는 1974년, [[바티칸]]에서 귀국하는 길에 긴급조치 위반으로 체포되었다가 석방되는 것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가 긴급조치 위반으로 투옥된 것은 [[김지하]]에게 준 돈 때문으로, 유신정권은 이를 [[민청학련]]의 자금으로 쓰였기 때문에 지학순 주교를 민청학련의 배후자로 몰았다. 중앙정보부로 연행된 지학순은 "김지하에게 돈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북한과는 무관한 돈"이라며 주장했다. 지학순이 연행되자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은 석방을 위해 박정희와 면담했고 [[윤공희]] 빅토리노 주교는 신부들과 시국기도회를 열었다. 덕분에 긴급조치 위반으로 체포된 후 하루만에 석방되었지만, [[명동성당]] 뒤편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서울관구 본원에 연금되었다. 얼마 후 동생 집으로 옮겼다가 [[명동성모병원]]에 입원한다. 곧 비상군법회의에서 출두명령을 내리자, 지학순은 "유신헌법은 무효"라는 양심선언을 하며, 공개적으로 유신정권에 저항하기에 이른다. ---- || [[파일:external/www.artnstudy.com/1975_04.jpg]] || || 1975년 석방 시기의 모습. [[김지하]]의 모습도 보인다. || ---- 양심선언 직후 지학순은 다시 중앙정보부로 연행된다. 이어진 재판에서 지학순은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역사관|서울구치소]]에 수감된다. 이때 지학순 석방을 요구하며 결성된 단체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다. 이 사제단이 민주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한국 민주화 운동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셈이었다. [[정의구현사제단]]뿐 아니라 가톨릭 전체에서도 지학순의 석방을 위한 움직임이 일었다. [[명동성당]]에서는 시국미사를 봉헌하고 지학순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 미사에는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 [[벨기에]] 대사도 참례했다. [[바티칸]] 또한 유감을 표명했다. [[김수환]], [[윤공희]], [[김재덕(주교)|김재덕]], [[두봉]], [[나길모]], [[황민성]] 주교 등 다른 고위성직자들도 지학순 석방에 힘을 모았다. 외교 마찰 및 가톨릭계와의 관계 악화를 우려한 [[박정희]] 정권은 지학순을 1975년에 석방한다.[* 물론 [[박정희]] 정권이 지학순을 순순히 풀어준 건 아니다. 치졸한 방법으로 지학순에게 복수했다. 외국인 신부 추방이 대표적이다. 외국인 신부의 비자를 2달마다 갱신하도록 입장을 바꿨다. 이 탓에 [[원주교구]]의 2인자인 총대리 정 레오 신부도 체류 허가를 받지 못해 추방 당했다.] 석방 직후 지학순은 [[바티칸]]을 방문했는데, 성직자의 현실 참여를 바라보는 바티칸의 입장은 긍정과 부정이 엇갈렸다. 하지만 [[바오로 6세]]는 "너는 착한 목자다"며 지학순을 격려했다. 석방 이후에도 지학순은 민주화운동을 계속했다. [[김지하]]가 반공법 위반으로 수감되자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원주교구의 신현봉 신부 등이 구속되자 정부를 비판하기도 했다. 후에 지학순은 가톨릭노동청년회 총재로 활동하며 [[동일방직 똥물 사건]] 등 유신정권의 폭압적 노동정책을 비판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