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지학순 (문단 편집) === [[천주교 원주교구]]장 === 사제 서품 후 첫 임지는 [[부산광역시|부산]]의 반공포로수용소였다. 이때도 [[윤공희]] 신부와 함께 군종신부로 봉직한다. 그 후에는 잠시 [[천주교 청주교구|청주교구]]의 보좌신부로 있다가,1956년 11월에 윤공희 신부와 함께 [[이탈리아]] [[로마]]의 [[교황청립 우르바노 대학교|우르바노 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유학 도중 지학순은 [[당뇨병]]을 얻는데, 그는 당뇨로 생애 내내 고생했다.] 위 대학에서 교회법을 전공해 교회법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청주교구]]와 가톨릭대학교, [[천주교 부산교구|부산교구]] 등에서 봉직한다. 1965년 [[원주교구]]가 창설되자,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면서 주교 서품을 받고 교구장으로서의 일을 시작하게 된다. 그는 주교 서품 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하여 평신도 운동을 활성화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한다. 이때 [[장일순]], [[이창복]]등이 평신도로서 지학순을 돕는다. [[배론성지]]를 조성하고 [[진광고등학교]]를 설립한 것도 모두 지학순의 업적이다. 1967년부터 1973년까지는 [[천주교 군종교구|군종교구]]의 전신인 가톨릭 군종단의 총재를 맡기도 했다. 1970년, 어머니의 병원비와 동생의 학비 때문에 차비를 조금씩 빼돌린 어느 [[버스 안내양]]이 "죄책감 때문에 성당을 못 나간다"며 지학순을 찾아온 일이 있었다. 그에게 지학순은 죄가 아니라며 성당에 나오라고 말했다.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안내양이 생활을 위해 돈을 훔치는 건 종교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논지였다. 이야기가 알려지자 지학순은 [[MBC]]에서 “삥땅은 죄가 아니다”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