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지석영 (문단 편집) == 생애 == 1855년 5월 15일 한성부 중부 경행방 교동(오늘날 [[서울특별시]] [[종로구]] [[낙원동]])의 [[중인]] 가문에서 아버지 지익룡(池翼龍, 1812 ~ 1891. 11. 6)과 어머니 [[경주 이씨]] 이용철(李容哲)의 딸 사이의 4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지익룡은 그가 1883년([[고종(조선)|고종]] 20) 문과에 급제한 뒤, 1884년 조사위장(曹司衛將:정3품), 1885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정3품)를 거쳐 1886년 관료로서 80세를 채웠다는 이유로 가선대부(嘉善大夫:종2품 문관의 품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종2품)에 제수되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의 친구였던 [[한의사]] 박영선에게 [[한문]]과 [[한의학]]을 배웠다. 1876년 일본 [[수신사]]의 수행원으로 박영선이 동행하였는데 이 때 박영선은 [[일본]]에서 시행 중인 [[종두법]]을 접하게 되었고 [[서양]] 의학의 우두를 통해 종두법을 소개한 <종두귀감>이라는 [[책]]을 가져와서 [[제자]]에게 소개하였는데 그 중 1명이 지석영이다. 이후 1879년 [[부산광역시|부산]]에 있는 일본 [[해군]] 소속의 현대식 [[병원]]인 제생의원[* 제생의원은 [[개항]]과 함께 부산에 첫 상륙한 현대 의료 기관으로 [[미래]]의 전진 기지 확보를 위한 수단이었기에 나중에 [[육군]]이 상륙하자 모두 병참 기지로 바뀌었고 병원 [[건물]]은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에서 해군 [[군의관]]인 마쓰마에와 도쓰카에게 종두법을 배웠다. 부산에서 종두법을 배우고 서울로 가는 길에 [[충주시|충주]]에 있는 처가에 들러 어린 처남에게 처음 종두법을 실시하였다고 한다. 1880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위생국에서 우두 제조법을 배워서 [[서울특별시|서울]]에 종두장을 설립하고 본격적인 종두 접종을 시작하였다. 1883년([[고종(대한제국)|고종]] 20) 식년시 문과에 을과 6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c_1883_014277|급제하여]] 1887년 [[사헌부]] 장령(掌令:정4품) 등을 역임한 적도 있다. 그러나 시련이 닥치는데 [[국가]]의 각 분야 실정을 지적하다 조정의 미움을 받아 5년간 [[전라도]] [[강진군|강진]] 신지도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도 우두법 보급에 힘썼을 뿐 아니라 지적인 도약을 이루어냈다. 1891년 서양 [[의학]]에 의거한 [[위생]]학서이자 [[예방의학]]서인 <신학신설>을 [[한글]]로 간행한 것이다. 복직 이후 1894년 [[갑오개혁]] 때는 [[개화파]] 지식인의 일원으로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지냈으며, 1894년 [[갑오개혁]] 때는 [[개화파]] 지식인의 일원으로 형조참의(刑曹參議),김홍집에 의해 토포사로 임명되어 동학군 토벌을 하였다. 지석영 본인이 아군이라 표현한 일본군과 함께 하동 송림강 근방에서 동학혁명군 3000여 여명을 물에 빠져 죽게 하였다. [[부산광역시|동래]]부사 등을 지냈고 그가 두각을 보인 것은 [[대한제국]] 시기였는데 그는 의학교에 복귀하여 [[천연두]] 퇴치에 노력하였다. 지석영의 근대 [[의료]] 수용에 대한 열정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1898년 관립의학교 설립을 청원하여 [[한국]] 최초의 근대식 의학 [[교육]] 기관인 관립의학교가 세워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오가타 고안이 그랬던 것처럼 관립의학교 초대 [[교장]]으로 추대되었다. 지석영은 1899년 3월 28일부터 [[일본 제국|일제]]가 관립의학교를 대한의원으로 통폐합한 1907년 3월 15일까지 8년 동안 교장으로서 관립의학교를 이끌며 36명의 근대식 의사를 배출했다. 관립의학교는 [[일제강점기]]에 [[경성의학전문학교]]가 되고 1945년 [[광복]] 이후에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이 된다. 관립의학교 교장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한글 보급에 보다 힘을 기울였다. 1908년 2월 국문학자 [[주시경]] 등과 함께 [[국문연구소]] 위원으로 임명되어 한글 표기법을 정립하였으며 1909년 <자전석요(字典釋要)>를 간행하여 [[한자]]의 해석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1910년 8월 [[경술국치|한일병합]]이 이루어진 이후에는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초야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래도 평생의 과업은 놓을 수 없었던지 1914년 유유당(幼幼堂)이라는 소아 진료소를 차려 80년의 인생을 마감할 때까지 아이들의 [[건강]]을 돌보았다. [[경술국치]] 이후에는 대외 활동이 거의 없이 진료만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토 히로부미]] 추도식에서 추도사를 읽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친일]] 논란이 불거진 상태이며 아이러니하게도 1906년 [[민영환]]의 추도사를 읽기도 하였다. 이토 히로부미 추도사를 읽고 불과 15일 뒤에는 [[이재명(독립운동가)|이재명]] 의사와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