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지린시 (문단 편집) == 역사 == 고대 [[북부여]]의 중심지로, 예성(濊城)과 [[부여성]]이 위치했다. 이후 고구려와 [[발해]]를 거쳐 요나라, 발해부흥국들, 금나라의 지배를 받았다. [[명나라]] [[영락제]]가 당시 일대를 지배하던 여진 안부를 복속시켰으나 일시적인 것에 그쳤다. 17세기 초엽 [[후금]]이 일대를 정복하였고, [[청나라]] 대인 1671년에 길림성(吉林城)이 세워졌다. 1727년 영길주(永吉州)가 설치되어 길림성에 중심지를 두었고, 1747년 영길주를 고쳐 길림청(吉林廳)이 되었다. 1881년에는 길림청이 길림직예청으로 승격되었다가 이듬해인 1882년 다시 길림부(吉林府)로 승격해 일대의 중심이 되었다. 다만 20세기 들어 [[창춘]]이 성장하며 점차 위세가 창춘에 밀리게 되었고, [[신해혁명]] 이후인 1913년에는 길림부가 길림현(吉林縣)으로 격하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성도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1929년에는 길림현에서 영길현(永吉縣)으로 이름이 바뀌고 동시에 길림시정주비처(吉林市政籌備處)가 설치되었다. 1931년 9월 21일, 불과 3일 전 [[만주사변]]을 일으킨 [[관동군]]에 의해 길림성(城)이 점령당했고, 이듬해인 1932년 3월 1일 괴뢰국가 [[만주국]]이 수립되자 만주국 길림성공서(吉林省公署)가 성립되었다. 지린은 홍수가 잦았기에 1937년 [[만주국]] 시기에 펑만댐 건설이 시작되었다. 1945년 [[일본 제국|일제]]가 패망한 뒤 그해 10월 [[중국공산당]] 길림시위원회의 조직 하에 길림시정부가 수립되었다. 1948년 해방 후에도 지린성의 성도 지위를 유지했고, 1953년에는 펑만댐이 완공되었다. 다만 1954년 성도는 창춘으로 옮겨졌다. [[문화대혁명]] 시기인 1968년 ~ 1980년에는 지린시 혁명 위원회가 자치적으로 통치하기도 하였다. 2005년 석유 화학 발전소 폭발로 6명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부상하는 사고가 있었다. 2010년에는 홍수가 발생하여 백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왔고 독성 화학 물질이 담긴 통 수천개가 방류되어 군병력이 동원되는 등 혼란을 겪었다. 이후 펑만댐을 증축하여 2019년 완공, 이후로는 수해 피해가 거의 사라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