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증포 (문단 편집) === 장돈과의 대립과 갈등 === 증포는 신종 생전에 지방을 전전해야 했다. 그러다가 원풍 8년(1085년) 신종이 승하하고 어린 철종이 뒤를 잇게 되었다. 이때 철종이 고작 10세 밖에 되지 않아 신종의 어머니이자 철종의 할머니인 [[선인성렬황후 고씨|선인태후 고씨(고태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과거 당쟁으로 쫓겨난 이들을 다시 개봉으로 복직시키거나 그 명예를 회복시켰다. 이때 증포 역시 신법파였음에도 일찍이 신법의 폐단을 지적하다가 탄핵되었기에 한림학사로 복직되어 개봉으로 돌아왔다. 이후 그는 호부상서로 승진했다. 1093년, 선인태후가 승하하고 장성한 철종이 친정하게 되면서 철종은 신법의 재추진과 함께 신법파의 [[장돈]][* 신법파의 일원이자 왕안석과는 친구로 한때 신법의 진행이 급하고 문제가 있다고 하여 증포와 마찬가지로 지방으로 좌천되기도 했다. 그는 본래 냉정하고 지나치게 매몰찬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그의 성격은 “장돈의 재능이 뛰어나고 사심없이 냉철하게 일을 추진한다”, “뛰어난 정치적, 행정적 능력과 성과가 있기에 일을 맡음에 믿고 맡길만 하다”, “판단력이 뛰어나고 객관적이다” 등의 평가를 신구법파 모두에게 받을 수 있게 했다. 하지만 타협점을 찾기 힘든 원칙론자였던 장돈은 정적을 공격하는 정치적 술수를 꾸밈에도 뛰어났고 워낙 냉정한 인물이라서 신구법파 모두에게 적이 많았다.]을 재상으로 임명하고 증포 등 신법파 관료들을 대거 중용했다. 이때 증포는 철종에게 장돈을 극진히 대하고 찬양하며 내심 장돈이 자신을 추천하길 바랬지만, 장돈은 이런 증포를 오히려 경계하며 추천하지 않고 추밀원에서만 증포를 추천했다. 이런 까닭에 증포는 장돈을 시기하고 더욱 사이가 벌어졌다. 철종 친정기 당시 재상 장돈은 신종의 신법을 계승해야함을 주장하고 선인태후 생전 원우연간의 폐단을 조사하는 대옥을 일으켰다. 이때 매일같이 이 사건에 연루된 관리들이 귀양을 가거나 황제 앞에서 처벌을 받았는데 증포도 이 조사 과정에서 일부에게 모함을 당했다. [* 이 당시 소식, 소철 형제 등도 관직이 폄하되어 지방으로 좌천되고, 그 죄의 정도가 심한 인물로 몰린 경우에는 연좌죄로 그 후손들까지 그 관직을 막았다. 이때 구양수의 셋째 아들인 구양비도 증포와 증포의 처남인 위태에게 눈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원우당인이라 모함받아 노주 지주로 좌천되었고 귀향조치 당했다. 그러다가 철종 원부 연간에 다시 복직되었다.] 이에 증포는 장돈을 지적하며 “황제께서 권력을 쥐고 계시는데, 오직 사람들과 언관들은 재상[* 장돈] 만을 두려워하고 황제 폐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런데 내가 어찌 이런 사실을 앎에도 이를 고발하지 않을 수 있겠소.”라고 말하며 장돈을 공격했다. 하지만 장돈은 대옥 사건을 일으켰음에도 사대부들의 지지를 얻고 반발 폭을 줄이기 위해 철종에게 여러 명사들을 추천해 등용케하고, 사마광과 여공저의 시호와 묘비, 묘석 등의 훼손은 아니된다고 주장해 관철시켰다. 따라서 증포의 장돈 배척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다. 1100년 겨울, 철종이 갑작스레 건강이 악화되어 승하하게 되면서 신종의 정비이자 당시 황실 최고 어른인 [[흠성헌숙황후 상씨|상태후]] 주재 하에 후화원에서 후계건저회의가 열리게 된다. 이때 장돈은 조정 대신의 대표인 재상으로서 상태후에게 예율과 예법대로 신왕 조필과 간왕 조사가 그 후계가 되어야 하며, 이중 철종의 동복동생인 간왕이 예율에 따라 뒤를 이어야 함을 주장했다. 이때 증포는 상태후에게 “장돈은 저희와 상의하지 않았습니다”라고 주장하며 장돈 주장의 무게감을 떨어뜨리고 가장 황제감으로 적합하지 않은 단왕 조길(훗날 휘종)을 지지하던 상태후 편을 들었다. 이런 증포의 행동에 장돈과 일부는 단왕이 행실 등을 지적하며 반대했지만 증포가 상태후와 그녀를 따르던 대신들과 합세해 “장유유서에 따라 신왕의 즉위가 아니되면 예법과 철종의 유지대로 간왕이 뒤를 이어야 한다”는 장돈의 주장이 관철되지 못하게끔 했다. 여기에는 장돈의 주장에 대해 상태후의 반박[* 당시 신왕 조필은 상태후의 말대로 눈병이 심해 후계에서 제외되는데 있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실제 신왕은 눈병이 심해 바로 앞의 사람도 자세히 분간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당시 사이코패스, 지적 장애인보다 황제가 되면 안 되는 더 큰 결함요소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부분은 신왕과 같은 결함이었다고 한다.][* 상태후는 ‘주덕비의 소생이 두명이나 황제가 되면 자신이 껍데기만 정실일 뿐 주덕비가 정실과 다름없다’고 판단해 철종의 유지와 황실예법을 후화원 건저회의 시작부터 무의미하게 진행시켰다. 이때 그녀는 “내가 정실이지만 자식이 없고, 살아있는 신종의 아들들이 모두 서자들이라서 그 위아래가 없다”고 발언했다. 그리고 이런 상태후의 발언들은 당연히 재상 장돈이 ‘황실 최고 어른이 철종의 유지도 어기고 황실의 계승법도까지 어기느냐”라면서 강하게 반발하고 나가는 이유가 되었다.]도 컸지만, 상태후가 예법을 어기는 것에 대해 증포가 이를 편들면서 장돈을 공격한 발언 역시 단왕이 황제가 되는 것에 큰 도움을 주었다. 따라서 10대 초반부터 평소 무게감있지 못하고 사치스럽고 여색을 탐하며 음담패설 등의 행실로 유명해 황제감이 아니라고 평가받고 있던[* 단왕 조길은 평소의 행실과 달리 상태후 앞에서는 예의를 갖추고 그 비위를 잘 맞췄다고 한다. 따라서 상태후와 그 측근들은 단왕 조길을 좋게 평가했다. 실제로 단왕은 회화, 시무 실력이 뛰어났고 멋쟁이에 단정한 외모와 말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 [* 상태후와 철종, 간왕의 생모 주덕비 사이가 워낙 나빴던 이유도 상태후가 단왕 조길을 지지한 이유였다.] 단왕 조길이 즉위했는데 그가 바로 휘종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