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증산도 (문단 편집) === 안세찬의 재등장과 증산도의 성립 === 약 20여년이 지난 1975년, 증산교 본부의 창교주인 이상호, 동생이자 2대 교주인 이정립이 모두 사망하자 안세찬은 20여 년 만에 [[증산교 본부|증산교 대법사]]에 나타났다. 안세찬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펴며 자신을 중심으로 조직을 개편하라고 요구했다. 1. 1951년 출교처분을 받았을 때 자기(안세찬)는 다른 간부들에게 "내가 또 오리다. 교단 잘 지키소"라고 했으며, 2. 증산교 본부의 간부들은 모두 사표를 내고, 예전 안세찬과 가까웠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교단을 새로 조직해야 하고, 3. 자기(안세찬)는 강일순의 직제자 중 한 명인 이치복의 연원을 이었으며, 이상호([[증산교 본부|증산교 대법사]] 창교주)와는 동지적인 입장에서 일했다는 것이다. [[증산교 본부|증산교 대법사]] 교단 신자들 대다수가 이 주장을 따르지 않고 반박했다. 1. 출교처분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다른 간부들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이며, 2. 출교처분을 받고 20년간 교단을 떠난 사람이 이제 와서 이런 주장을 함은 교단 내 규정이 인정치 않고, 3. 이상호도 아니고 이치복의 연원을 주장하면서 20년간 떠나놓은 사람이 교단 일에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증산교 본부에서는 안세찬이 이상호와 동지적 입장에서 일했다는 것도 부정한다. 1975년에 안세찬은 아들 안중건과 함께 몇 차례 증산교 본부를 찾아가 자기 주장을 펄쳤는데, 이때 안중건이 정역에 입각한 새로운 주장을 하자 [[증산교 본부|증산교 대법사]] 측 사람들이 이를 제지했다. 그래서 증산교 본부측 사람을 두고 무례하다고 하여 폭언이 오가다가 싸움이 붙기도 하였다. 아무 소득이 없자 1978년, 셋째 아들 안중건과 함께 대전을 중심으로 하여 '대법사 증산교'라는 이름으로 창교하였다. 그런데 대법사든 증산교든 모두 증산교 본부가 사용했었던(대법사) 이름이거나 사용하는 중인(증산교) 이름인지라 많은 사람들이 이상호 증산교와 안세찬 증산교를 혼동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대전 증산교, 증산교 등으로 교명을 바꾸다가 1984년에 비로소 현재 사용하는 '증산도'라는 교명을 채택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