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증산도 (문단 편집) === 일제 강점기와 차경석의 [[보천교]] === 이후 차경석의 '''[[보천교]]는 교세가 한때 600만 신도라고 자체적으로 주장할 정도로 흥성했으나''' 일제의 집요한 탄압으로 차경석 사망 이후 붕괴된다. 증산도 관련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일제는 증산 계열 교단을 독립운동의 소굴로 보고 집요하게 탄압[* 실제로 보천교는 상해 임시정부 설립자금을 대기도 했고, 보천교가 일제에 노출되게 된 것도 독립자금을 수금하다 발각되어서 였다.]하여 일제시대의 증산 신앙인들은 모두 지하활동으로 연명해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독립운동'이라는 게, '보천교를 믿다 보면 일제가 몰락하고 교주 차경석이 조선의 임금이 된다'는 것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차경석 본인이 직접 천자를 칭한 적은 없으나 제를 올리면서 제문에 "나라 이름은 대시국(大時國)"이라고 밝히는 등 나라를 세울 것처럼 말하였다. 아마 직접 말은 안 했어도 자기가 도통한 뒤 군주가 되리라 믿었던 듯하다. 이 때문에 다른 제자들에게서도 말이 나왔는데, 사실 차경석은 강일순의 제자들 중에서도 굉장히 늦게 들어온 사람이었다. 더하여 독립운동자금으로 쓴다며 모은 거액의 돈 중 '실제 독립운동' 계열로 흘러들어간 것 중 상당수의 자금은 앞의 '독립운동', 즉 차경석이 천자가 된다는 허상을 부풀리는 데 쓰였다. 보천교 내부에서는 일제를 상대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해 상당한 진통이 있었다. '차천자의 꿈'에 보면 당시의 상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차경석은 처음에는 강일순을 신앙함으로써 정말로 도통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날이 실제로 보천교까지 세우고 자신이 신앙생활을 실천해도 강일순이 말했던 것과 같은 도통을 얻을 수 없었다. 차경석은 날이 갈수록 강일순에 대한 신앙심을 잃다가, 결국 강일순을 기만적인 도인 정도로 판단하기에 이른다. 차경석은 보천교의 신앙체계를 강일순으로부터 벗어나 유교에 가깝게 바꾸려고 했고, 유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을 모아 성리학+종교 정도로 만들려고 했다. 이에 보천교 신자 전체는 차경석이 바꾼 신앙을 따르는 신파와 예전대로 강일순을 신앙하는 구파로 나뉘어 서로 다투었다. 차경석은 전라도 정읍에 보천교 총본산인 '십일전'을 세웠는데, 군산항을 통하여 만주에서 소나무를 들여오기까지 하여 경복궁 근정전보다 더 컸다.[* 차경석이 죽은 이후 일제는 바로 십일전을 경매에 부쳤고, 조계종단이 십일전 건물을 샀다. 십일전을 조각조각 나누어 기차에 실어 서울까지 싣고 올라와 다시 조립했다. 이 건물이 오늘날 서울에 있는 [[조계사]] 대웅전 건물이다. 십일전 시절과 비교하면 건물을 조금 손보고 장식이나 벽화를 불교풍으로 바꾼 점을 제외하면 거의 원형 그대로이다.] 십일전을 세우며 차경석은 큰 교세를 기울였다. 원래 그 안에는 강일순을 봉안했지만, 차경석이 강일순을 따르지 않기로 한 다음에는 차경석의 부인이 환상을 봤다면서, 강일순은 사슬에 묶여 있고 차경석의 영위가 상제로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고 주장했다. 민중들의 충성심도 강했지만, 일제의 탄압도 집요했고, 민중과 별개로 다른 종교와도 사이가 나빴으며[* 특히 천도교쪽에서 보천교를 많이 적대시했다. 무명의 천도교 인사가 차경석을 만나 대담한 뒤 천도교 잡지에 실은 기록도 있다.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은 천도교 인사가 평한 바로는 "옛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영웅호걸이 되었을 법한 사람" 보통 사람이 아니긴 한데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경의와 비아냥을 동시에 담은 평.] 조선인 지식인 사이에서도 구시대적인 가치를 들먹이며 재산을 헌납하기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비판이 많았다. 한편 충청도 서산지역의 부호로 안병욱이라는 보천교 신자가 있었다. 안세찬은 안병욱의 장남으로 태어나 강증산을 신앙하는 가풍 속에서 자랐다. 안세찬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12세 때 '홀연히 영성이 열리는 큰 체험'을 하고 자신이 강증산의 뜻을 잇겠노라 다짐했다고 한다.[* [[http://www.jsd.or.kr/c/jsd/intro/341/396/342]]] 일제치하였던 당시 안세찬은 징용을 피해 집을 나와 중국 및 만주 등지를 유람하며 견문을 쌓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