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증국번 (문단 편집) === 말년 === 태평천국이 진압된 후, 구(舊) 질서 하에서 서양의 기술을 도입하여 체제를 강화하려는 [[양무운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동치제]] 중후반에는 청나라는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고, 이를 '''"동치중흥"'''이라고 한다.[* 물론 양무운동의 성과는 [[청불전쟁]]과 [[청일전쟁]] 이후 쇠락했고, 청나라는 더 막장화되지만...] 한편 증국번의 상군(湘軍)과 회군(淮軍)은 이홍장이 건설한 북양군(北洋軍)의 주축이 되며, 북양군의 지휘관들은 신해혁명 후에 민국 초반을 주름잡는 [[군벌]]이 된다. 북양군의 해군인 [[북양함대]]는 나중에 동아시아 최대의 함대가 된다. 물론 청나라가 [[신해혁명]]으로 인해 [[중화민국]]에 망하게 된 뒤 북양함대뿐 아니라 북양군 자체도 쇠락해졌지만 말이다. 증국번은 몰락한 [[팔기군]]을 대신하여 청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무장집단이었던 상군(湘軍)과 회군(淮軍)을 실질적으로 지휘할 수 있었고, 이렇게 군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주변 한족 부하들에게 [[황제]]위에 오르라는 부추김을 많이 받았다. 실제로 당시 청 조정의 실권은 이미 증국번을 위시한 한족 세력에 넘어가 있었다. 증국번이 태평전쟁 진압을 지휘하면서 발탁한 각 성의 [[순무(관직)|순무]]와 [[총독(중국)|총독]][* 주로 남중국 지역]으로 있었던 터라 이들의 반란 가담은 최소한 양쯔강 이남 지방에 한해서 한족 왕조가 세워질 가능성이 충분했다. 허나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청조의 충신으로 남았다. 비유하자면 본인이 가진 군사력으로 청조를 좌지우지할 수 있었지만, [[조조]] 대신 [[제갈량|제갈공명]]의 길을 걸어서 끝까지 청조의 충직한 신하로 남았다. 사실 아무리 부하 총독들이 가담한다 한들 거의 다 [[군벌]]화가 완료된 상태이기에 언제든지 배신하고 청에 붙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또한 거사의 기반이 될 강남 지역은 오랜 전란으로 황폐해졌고 향용의 학살 행위 때문에 민심은 바닥을 찍어 이런 상태에서 거병을 한다면 [[삼번의 난]] 시즌 2를 찍을 판이었다. 더욱이 베이징에서 [[제2차 아편전쟁]]을 치르던 서양 세력들이 남쪽에선 청을 도와 태평천국과 싸우는 것을 본 증국번으로써는 도저히 성공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또한 본인이 유교경전을 뼈속까지 공부해야 급제할 수 있는 과거를 통과해 올라온 정통 성리학자였고, 청조에 반기를 드는 것이 본인의 신념에 어긋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처음부터 [[제갈량]]처럼 야심이 없었을 수도 있다. 1872년 양강총독 재직중 [[홍수전]]의 이전 거처인 남경에서 사망하였다. 1870년에 양강총독으로 갓 부임한 [[마신이]]가 장문상의 칼에 찔려 죽는 사건이 생기고 마신이가 죽은 뒤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증국번이 양강총독으로 재부임하여 사건을 마무리한다. 살인자인 장문상은 [[능지형]]을 받고 죽게 되었으나 민심은 어수선했다. 양강총독 마신이 살해 사건은 '''[[청말 4대 기안#s-3|자마(刺馬) 사건]]'''이라 부르며 청나라 말기의 미스테리한 사건으로 남게 되었고 여러 편의 영화[* 자마, [[명장(영화)]] 등]로도 만들어진다. 직예총독의 자리에서 양강총독으로 자리를 옮기며 급히 마신이 사건을 수습한 증국번은 1872년에 사망하고 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