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일전쟁 (문단 편집) == 역사에서의 비중 == >중일전쟁은 엄청난 역경에도 불구하고 고난에 처한 정부와 인민이 적에게 맞서 "최후까지의 항전"에서 승리를 거둠으로 기자들과 외교관들이 중국이 살아남을 수 없으리라고 거듭해서 내놓은 예측이 틀렸음을 증명한 영웅적인 저항이었다. [[진주만 공습]] 이전까지 4년이 넘는 기간 동안 중국은 일본에 맞서 사실상 홀로 싸웠다. 이 시기에 가난하고 낙후된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잘 무장되고 기술적으로 발달된 나라 중 하나의 80만 병력을 저지했다. 이후의 또 다른 4년 동안, 유럽과 아시아 두 전선에서 동시에 싸워 연합국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중화민국이 전쟁에 남아 분명한 역할을 수행한 덕분이었다. >---- >[[http://www.amazon.com/Forgotten-Ally-China%C2%92s-World-1937-1945/dp/061889425X|《중국, 잊힌 연합국》(《Forgotten Ally: China’s World War II, 1937-1945》), 2013년도 출판]], 라나 미터(Rana Mitter, [[옥스퍼드 대학]] 역사학 교수, 중국연구센터 주임), 서문 6페이지. 194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전 세계의 진보적 지식인들과 예술가, 정치가, 혁명가들에게 파시즘에 맞서는 영웅적인 항쟁으로 기록되면서 찬사를 받고,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전쟁이었지만 정작 중일전쟁이 종결된 다음에는 역사에서 완전히 잊혀지다시피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을 다룬 전쟁사 연구에서도 대부분 누락되어, 1980년대에 나온 타임라이프사의 《제2차 세계 대전사》의 경우는 아예 중일전쟁을 '''2차 대전의 배경 중 하나'''로 간주해 중국 - 버마 - 인도 전역만을 다루고 있고, 충칭 대공습과 대륙타통 작전을 제외하고는 '''버마 전선'''만 다루고 있다. 이렇게 된 것은 전쟁 당사자인 중화민국이 패배하여 대륙에서 쫓겨났고 그 뒤를 이은 중화인민공화국은 중일전쟁에 대한 담론을 깨끗이 무시했으며, 냉전의 결과로 서방에서는 제2차 국공내전에서 중국 대륙을 잃었던 이유를 추궁하기에 바빴던 탓이다. 연구에도 오랫동안 난황을 겪었는데 기본적인 사료가 그렇게 빈약하지는 않으나 객관성의 문제가 있어서 검증이 어려운 탓이 크다. 일단 일본군의 1차 자료는 1945년 일본 제국 패망 이후 자신들에게 불리한 자료를 조직적으로 파기한데다가 전쟁 합리화, 선전을 위해 사상자 누락, 왜곡 등 조작이나 자화자찬이 많았다. 중국군의 경우에는 중화민국측 자료는 양은 많으나 대만 밖을 나가질 못했는데다가 이 또한 객관적이지 못하다. 게다가 제2차 국공내전의 승자인 중화인민공화국의 프로파간다에 묻혀버렸고[* 이러한 경향은 국공내전이 재개되기 전인 중일전쟁 시절부터 심했다. 자기들이 민주적이고 혼자 싸우고 있다는 마오쩌둥의 낚시질에 미국 언론인, 외교관, 군인까지 속았는데다가 중국의 학생과 지식인들도 낚여 국민당은 싸우지 않는단 인식이 파다했다.] 장제스가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어용학자들을 고용해서 조작한 자료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우, 중일전쟁 극초기와 백단대전을 빼면 거의 싸우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집권의 정당성을 위해 이를 숨기고 전쟁의 주역인 국민당을 깔아뭉갰다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으며 공산주의 국가 특유의 과장성으로 인해 사료에 기재된 전황의 정확성에 문제가 많고[* 당장 사상자 논란에서 보았듯이 자체 일본군 사살이 50만 명이 넘는다고 주장하는데 국민당과 싸우다 전사한 공식 전사자가 40만 명이다.] 애초에 중일전쟁 자체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은 감이 크다.[* 그 유명한 난징 대학살이나 충칭 대공습조차도 중국에서는 한때 신경을 안썼다.] 1980년대 이후로 중일전쟁 관련 자료를 공개하고 유격전과 전면전을 분리해 국민당의 역할도 조명했으나 장제스 비하 등이 사라지는덴 시간이 걸렸다. 이제는 상당히 전향적으로 재평가하는 편이지만 공산당 독재 치하의 연구라는 점에서 한계가 명확하다. 미국 등 기타 연합국의 자료는 애초에 버마 전선이나 대륙타통작전 정도만 빼면 관심도 없고[* 미 육군을 중심으로 미국 참전 이전인 1937년에서 1941년까지의 무관심과 편견이 당시부터 심각했다. 참전 이후 이전까지의 국민당군의 승리한 전투들을 모조리 조작이라고 치부할 정도였다.] 스틸웰과 장제스 사이의 불화에 집중한 데다가 당시 미국의 중국통이 패트릭 헐리나 앨버트 웨드마이어, 조지프 앨솝 정도만 빼면 마오빠가 되어서[* '''주중 미국 대사''' 클레런스 가우스가 '''대놓고 국민당을 멸망시켜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공산당을 '농촌 민주주의자' 정도로 인식한 낙관적 옹호와 국민당을 항일을 회피하는 부패정당으로 묘사하는 악의적인 보고를 많이 올렸으며 제2차 국공내전 이후 중국 대륙을 공산주의자들에게 잃은 것에 대한 미국 정부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화살을 국민당에게 돌리는 통에 이후 미국 쪽의 기록들은 국민당 정권 비난 일색에다가 역시 제3자라 자료가 적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의외로 일본에서 전후에 발간된 자료들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을 정도다.[* 일본 우익들 중에서도 만주사변까진 찬양해도 중일전쟁까지 찬양하는건 많이 답없는 자들이라 수가 적은 것도 있고, 중일전쟁의 당사자인 일본에선 중화인민공화국의 자화자찬 혁명사관을 진작부터 비판적으로 보아 중화민국 중심의 민국사관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움직임의 일환으로 나온 것이 산케이 신문에서 연재한 후, 출판된 《장개석비록》이다.] 게다가 전투가 크게 벌어지고 사상자도 많은데 실제 전쟁에 미친 영향이 거의 없다는 인식 또한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일본이 중국을 치지 않았으면 [[태평양 전쟁]]은 아예 발발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일본은 중국을 정복할 꿈에 가득 차 있었으나, 어마어마한 규모의 인구와 크기를 자랑하는 중국은 끝까지 버티면서 일본에 맞섰고, 일본이 결국 이 수렁에 빠져 피해가 커지자 더욱 군국주의를 밀어붙이고, 손해를 메꾸기 위해 동남아시아를 치기로 결정, 본격적으로 연합국, 그리고 미국과 마찰이 일어났다. '''중일전쟁이 없었다면 이후 동아시아 역사는 매우 크게 달라졌을 것이 뻔하기에 동아시아권에서는 매우 중요한 전쟁 중 하나이다.''' 중일전쟁은 태평양 전쟁 발발에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고, 발발 이후에도 태평양 전쟁의 일부이자, 일본 육군의 절대 다수를 붙잡아둔 중요 전선으로 기능했다. [[일본군]],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중일전쟁은 일본 육군이 주도하여 일으킨 전쟁이었고, 태평양 전쟁은 일본 해군이 주도한 전쟁이었다. 당연히 '''일본 육군의 주 관심은 중원, 만주 일대'''였지, '''듣도 보도 못한 머나먼 태평양 망망대해에 떠 있는 섬들이 아니었다.''' 따라서 태평양 전쟁 초•중반에 지상군 병력을 필요로 하는 전장에 대해 일본 육군은 그다지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고, 태평양 방면의 병력 파견 규모도 작전 구역의 면적을 생각해 보면 중원과 만주에 투입한 것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당장 [[과달카날 전투]]의 진행 경과만 봐도 이러한 점은 여실히 드러난다. 때문에 태평양 전쟁 개전 직후를 제외하고 연합군 지상군과 맞붙은 전장에서 일본군의 지상병력이 연합군 지상병력을 능가한 적은 없었으며[* 이는 지상병력의 신속한 기동이 불가능한 해상/섬 지역이라는 특성과, 요새화된 곳은 가급적 건너뛰고 상대적으로 취약한 곳만 골라서 찔러대는 미군의 전략에 의한 영향도 크다.], 이로 인해 태평양 전쟁에서의 지상전 양상은 대부분 '밀어붙이는 연합군(사실상 미군) vs 밀리는 일본군'이라는 구도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지상전의 패배는 그 일대의 제해권, 제공권 영구 상실[* 물론 전쟁 후반에 가면 압도적인 질적, 양적 차이에 의해 지상 점령 전부터 제해/제공권이 일방적으로 기울어진 상태에서 전투가 시작되었지만, 지상에 안정된 기지를 확보한 상태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땅을 딛고 사는 존재이다.]로 이어지면서 일본 제국의 패망으로 이어지는 데 한몫했다. 그리고, 전개 항목에 언급된 바와 같이 태평양 전쟁의 주요 전투들 중 일부는 중국 전역의 경과에 적게나마 영향을 받아 일어난 것도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의 시발점을 [[폴란드 침공]]이 아닌 중일전쟁 발발로 봐야한다는 주장이 2000년대 들어서 제기된다.[* 다만 대부분이 중국 연구에 관련된 학자나 중국 국적의 학자들이라는 특성이 있다.] 하지만 중일전쟁이 국제적으로 번져가지 않았다는 점에서 제2차 세계 대전과 중일전쟁은 별개의 전쟁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애초에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주제에서 [[나치 독일]]의 지분이 너무 크다. 전역의 규모로는 [[독소전쟁]] 하나만으로도 당시 전개된 모든 전역을 곁다리로 치부해버리는 게 가능한 수준이고,[* 후술하는 반박 문단은 중일전쟁의 규모가 독소전의 3/4 수준이었다는 점을 근거로 중일전쟁이 독소전 못지않게 비중이 크다고 주장하지만 독소전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물리적 피해 때문만이 아니라 독소전의 결과 소련은 세계 양강으로 떠올랐고 동독을 포함한 동유럽 전체가 공산화되어 향후 46년간 전개될 냉전의 구도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전쟁 이외의 부분으로 보더라도 나치당의 권력장악 과정 및 [[수권법]], 그리고 체계적으로 산업화되어 전개된 [[홀로코스트]]까지 생각한다면 제2차 세계 대전 = 나치 독일이라고 해도 전혀 부족하지가 않다. 다만 저 시각은 유럽 쪽으로 좀 많이 쏠린 관점이라는 반박도 존재한다. 독소전쟁을 예로 들었는데 전역 규모로는 아시아-태평양 전쟁도 결코 뒤지지 않고, 태평양 전역은 인류가 전쟁을 벌인 전역중 가장 넓은 지역이었다. 중일전쟁 사상자 숫자 또한 그때 당시 중국의 행정력 부족과 일본 측의 자료 폐기 등의 사료 인멸로 인해 적게 집계되었을 뿐이지, 실제론 중국에서 군민 포함 약 2,200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여 독소전쟁 당시 소련이 입은 피해 규모(2,900만 명)에 버금간다. 게다가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 뛰어드는 계기가 된 [[태평양 전쟁]]이 중국 전선에서의 막장 상황을 타개한답시고 일본군이 벌인 자살 행위였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의 연결고리는 있다.[* 자국사를 중심으로 세계사를 보는 현상은 흔한 일이다. 일례로 스페인에서는 [[스페인 내전]]이 제2차 세계 대전의 시작이라고 주장하고, 아프리카에서는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략 전쟁이 시발점이라고 주장하며, 반공학자의 일부의 [[러시아 내전]] 기원설까지 존재한다.] 또한 이 전쟁의 결과로 중화민국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 중 하나가 되어 [[유엔]] [[상임이사국]]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그 직후 발발한 제2차 국공내전에서 패배해 타이완으로 이동하고 대륙을 중국공산당이 접수하면서 극동 질서를 담당할 상임이사국, 즉 정통 중국이 누구냐에 대한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결국 1971년 중화민국이 형식적으로 자진 탈퇴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상임이사국 권리를 확보했다. 그러나 중국이 일본에게 어찌어찌 승리하긴 했으나 일본이 점령지에서 저지른 생체실험, [[신멸작전]](특히 [[난징 대학살]]) 등의 전쟁범죄로 인해 지금도 갈등의 요인이 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