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인전쟁 (문단 편집) == 전쟁의 양상 == [[파일:attachment/HU019009.jpg]] 이런 와중에 1959년에 [[티베트]]에서 중국에게서 독립을 원하는 티베트인의 대규모 봉기가 발생하자 중국 정부는 진압군을 티베트로 파견해 대규모 유혈 진압을 벌였고 티베트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 14세]]가 [[중국 공산당]] 정권의 종교 탄압과 티베트 문화 말살 정책에 반발하면서 인도로 피신해 [[티베트 망명정부|망명정부]]를 수립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달라이 라마의 망명정부 수립으로 두 국가간의 갈등은 더욱 증폭되어 갔다. 이로 말미암아 8월에 중국군과 소규모 총격전이 일어났으며, 10월에는 중국군이 인도 경찰 9명을 살해하기에 이른다. 이와중에 1950년대 말, 히말라야 소국을 마찬가지로 병합하던 인도군은 티베트 접경까지 주둔하게 되었고, 원래부터 인구가 희박해서 불명확한 국경에서 잦은 교전이 일어났다. 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지만 당시 중국은 [[대약진 운동]]의 부진으로 인한 내부 혼란 수습 및 미국, 소련과의 불편한 역학관계 때문에 또 다른 비상사태가 터지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또한 10월2일 소련의 흐루쇼프는 마오쩌둥과의 회담에서 인도 정부를 옹호하며 개입했다. 결국 이 사태는 당시 양국의 지도자인 [[저우언라이]]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중국 총리]]와 [[자와할랄 네루]] [[인도 총리]]간의 회담을 통해 당장 전쟁으로 비화되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양국은 11월 7일 관할선을 정해두는 것으로 사태를 일단락했다고 하지만 국경선의 최종합의에는 실패했다. 따라서 문제는 해결되긴커녕 오히려 복잡해져만 갔다. 중국이 예상 외로 소극적 입장으로 나서자 인도는 자신감을 얻었다. 당시 친소적 중립이었던 인도는 친미 성향을 보였던 파키스탄과 반소주의를 표방하기 시작한 중국 사이의 밀월 관계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따라서 이참에 자국의 군사력을 떨쳐 파키스탄을 비롯한 주변국에 엄포를 놓으려고 했다. 인도 입장에서는 다행스럽게도 당시 미국은 인도에 대한 중국과 소련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소련은 중국의 영향력 감소와 제3세계 국가들의 지지 여론 형성을 위해 인도에 호의적 입장을 보이고 있었다. 즉, 인도 입장에서는 중국에 대한 위협을 증강시키는 동시에 파키스탄을 압박하기에는 최적의 외교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1961년, [[인도 해군]]은 파키스탄과 전쟁이 일어날 경우에 대비해 영국으로부터 [[항공모함]] '비크란트'를 인도받았다. 이같은 아시아 국가 초유의 항공모함 도입을 보더라도 당시 인도가 얼마나 해군력 증강에 의욕적이었는지는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다. 그런데 비크란트의 인도는 어디까지나 인도양의 바다를 끼고 있는 파키스탄의 해군에 대항하기 위한 목적이며, 전투행동반경에서 벗어난 티베트 등지 내륙 지역의 분쟁에는 대응 능력을 갖추지 못한 경항모로써 중인전쟁 때는 전혀 실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물론 항모 도입이 패착이었던 것은 아니고, 이때 도입한 항공모함 비크란트는 인도의 기대에 부응하여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인도-파키스탄 전쟁]]에서 현존 파키스탄 해군의 절반을 격침시키고 벵골만을 봉쇄하여 방글라데시를 해방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Tariq Ali (1983). Can Pakistan Survive? The Death of a State. Penguin Books Ltd. ISBN 978-0-14-022401-6.] 1962년 봄, [[소련군]] 군사고문단의 협력을 얻은 [[인도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본격적으로 맥마흔 라인에 [[육군]] 부대들을 전진배치했다. [[인민해방군 육군]]의 전투 태세 또한 보다 견고해졌다. 하지만 인도는 정말 중국이 전쟁을 감행할 지 예측하지 못하였다. 1962년 8월에 와서도 인도 군부의 D. K. 팔리트 여단장은 근미래에 중국과의 전쟁 가능성은 배제해도 된다고 주장했다[* Swaminathan South Asia Analysis Group Lessons of 1962: A stock taking after 40 years.] 대부분의 서방측 군사전문가들은 인도군의 우세를 예상하였다. 일단 보급로부터가 차이가 났는데, 티벳을 관할하는 청두(성도)군구의 수도이자 보급기지인 청두와 분쟁지는 거리가 3,000㎞인데다가 도로는 거의 없었고, 날씨가 나쁘면 아예 그런 도로도 불통되는 지역이었다. 그래서 중국군의 보급은 등짐과 야크에 의존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에 반해 인도의 수도 뉴델리로부터 분쟁지는 수백 ㎞밖에 안떨어져 있었는데다가 양호한 도로가 구비되어 있었다. 결국 인민해방군은 중화기는 꿈도 못꾸고 가지고 있는 지원화력은 박격포 정도였으며, 뿐만 아니라 티벳지역에는 당시 인민해방군 공군 기지가 없었기 때문에 중국군은 제공권도 장악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인도군은 방심하지 않고 있었다. 북상하던 인도군에는 인도군 최정예 혹은 최강으로 꼽히던 제7여단, 제4사단에 구르카나 시크 부대 등 정예 부대가 많았다. 단지 인도 정부의 생각과 다르게 중국의 전투 의지가 매우 높아서 인도의 예상을 뛰어넘는 전력을 투입했다. 10월 6일 중국의 마오쩌둥 및 수뇌부는 인도와의 동부 국경과 서부 국경에서 동시에 조정된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하고, 동부 전선을 주공으로 결정했다. 10월 8일 중국의 청두와 란저우 군구로부터 티베트에 정예 부대를 파견하였고, 10월 16일 중국의 [[류보청]](劉伯承) 원수가 수립한 중인전쟁 계획이 승인받았다. 그리고 10월 18일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이 중인전쟁 개전을 최종 결정했다. 마침내 10월 20일에는 1,000km에 이르는 국경의 전 방면으로 중국의 주력군이 침공을 개시하면서 바야흐로 1개월 간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중국이 80,000~90,000명의 병력을 동원, 규모면에서도 국경수비대의 소규모 교전을 벗어난 정규군간의 정면 충돌로 비화된 것이다. 미처 전쟁을 예측하지 못한 인도군은 겨우 1~1.2만 병력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동부 전선에서는 중국군 3개 연대가 남카추 강으로 진격하여 겨우 인도군 1개 대대, 그것도 병력이 완편되지 않은 인도군에게 야간에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압도했다. 다급한 인도군은 부탄으로 도주하기도 했다. 23일의 중국군 대공세는 인도군의 정확한 포격에 일시 고착되어 제4시크 연대가 3일간 저지하였으나 중국군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포위하자 결국 후퇴한다. 이후 중국군은 산악 통로로 접근하여 인도군 1만 명의 보급로를 끊고 인도군에게 막대한 사상자를 내게 하고, 휴전이 발표되었을 당시, 아삼 북동 국경으로부터 50km 들어간 테즈푸르까지 진격한 후 전쟁을 중단했다. 한편 서부 전선에서는 중국군의 거대한 규모를 감지한 인도군이 거의 저항하지 않고 전방 초소를 포기하고 퇴각하였다. 그러던 와중에 눈이 내리는 매우 추운 겨울 날씨 가운데, 잠무-카슈미르 주에서 중국군은 중포와 기관총의 화력 지원을 통해 쿠마온 연대의 샤이탄 싱 소령이 이끄는 C중대원 123명이 지키던 해발 5,000m 고도에 위치한 레장 라 진지를 점령했다. 싱 소령의 시신은 나중에 맹추위에 얼어붙은 상태로 발견된다. 반격을 위해 인도군이 더 많은 병력을 불러모으는 동안, 중국군의 일방적인 휴전 포고로 전쟁은 끝났다. [[파일:attachment/1962uniform.jpg]] 중국군사박물관에 전시된 중인분쟁 당시의 인민해방군 육군 [[보병]] 군장. 10년전의 [[한국전쟁]]에 비해 달라진 점은 일단 전투복 색이 한국전 때의 황토색 계열에서 올리브색으로 바뀌었고, [[AK-47]]의 라이선스판인 [[56식 보총]]이 도입되었다. 1950년대 말 중국이 식량으로 AK-47을 비롯한 무기 라이선스비를 지불했다가 그만 [[대약진운동]]과 겹쳐 참극을 빚었다… 철저히 전쟁 준비를 거친 중국군의 장비와 훈련 수준은 인도군을 훨씬 상회하는 것이었다. [[존 키건]]의 <세계전쟁사>에는 '''"중국군이 티벳 지방에서 1년 이상 고산지대 적응훈련을 마친 상태였던 반면에 인도군은 고산지대 적응훈련을 받지도 않은 부대를 투입했다."'''고 나온다. 여기에 인도군의 주력소총은 수동식 볼트액션 방식의 [[리-엔필드]]인데 반해 중국군은 1956년부터 라이선스 생산을 하기 시작한 [[AK-47]]의 중국버전 [[56식 자동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게다가 중국군 지휘관들은 [[중일전쟁]], [[국공내전]], [[6.25 전쟁]]을 거치며 실전경험이 많았고, 특히 [[6.25 전쟁]] 때는 [[초강대국]] [[미국]]의 압도적인 제공권을 위에 두고도 산악지대에서 수없는 기동전을 치뤄본 적이 있었다. 병력은 물론 전술, 지형적으로도 우위를 점했던 중국은 은밀하고도 철저한 기습에 성공하여 파죽지세로 인도 영내를 향해 밀고 들어갔다. [[파일:attachment/chineseawacs.jpg]]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전쟁에서 중국 공군은 [[B-29]]를 복제한 소련제 [[Tu-4]]를 가지고 [[폭격기]], [[정찰기]], [[수송기]], 심지어는 [[조기경보기]]로 사용했다. 히말라야 지역에서 제대로 수송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이 짝퉁 B-29는 큰 활약을 했고, 덕분에 아마도 이 전쟁은 최후로 B-29가 활약한 전장이라고 볼 수도 있다. 반면 인도군 측은 거의 공군의 지원을 받지 못했고 이것이 험한 산악지형에서 방어라는 이점에도 불구하고 피해가 크고 쉽게 밀린 원인으로 지목되기 한다. 그나마, 중국 육군의 공세 시기에 인도 육군도 1개 중대의 선전으로 최소한의 체면치레는 했다. 실질적으로 관구사령부라고 봐도 무방한 육군 쿠마온 연대(Kumaon Regiment) 13대대 C중대가 선전의 주인공이다. C중대원 123명은 전멸(중대원 88%에 해당하는 109명이 전사하고 생존자 14명 중 9명이 중상을 입은 상태로 투항)할 때까지 저항, 중국군에게 이 전쟁에서 발생한 피해의 1/3인 500여 명의 사상자를 강요한 것으로 공인되었고,[* 인도 측 주장은 1,000명 이상 사살이라고하지만 신빙성이 떨어진다.] 중대장 샤이탄 싱 육군[[소령]]은 인도의 국민 영웅이 되었다. 그리고 인도군은 이후에 제대로 된 저항을 보여주지 못한 채 무력하게 패퇴하였다. 아무튼 개전 7일만에 중국군은 파죽지세로 160㎞를 진군했고, 인도 동북부 아삼 지방의 브라마푸트라 평원까지 진출한다. 유리한 상황이었지만, 중국은 [[공세종말점]]을 향해 가고 있었다. 미국과 소련은 전략적 요충지인 [[아시아]]와 인도양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더 이상 확대되지 않도록 압박을 가했고, 다른 제3세계 국가들도 양국의 충돌 격화를 말리고 있었다. 자칫하면 양국과 이해관계로 얽힌 제3세계 국가들끼리도 대립이 일어나 '''[[3차 세계대전]]'''이 날 판이었다. 중국 정부 역시 이러한 분위기를 고려하여, 군사적인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정치적 판단 하에 인도에 휴전을 제의했다. 하지만 인도 정부는 그 제의를 거부했고, 그에 따라 중국군은 11월 18일 대대적인 공세를 재개하여 인도 정부를 압박하기에 이른다. 전쟁이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 중국군은 뉴델리의 20㎞ 근방까지 진주해 있었다는 말도 있지만 사실 전쟁 막바지까지 여전히 전투는 변두리에서 진행 중이었다. 인도 영내 깊숙히 밀린 건 사실이지만, 인도도 중국 못지 않은 거대한 영토를 지닌 국가다. 국경에서 좀 밀렸다고 수도 함락 위기까지는 아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인도의 네루 총리는 '''비동맹주의를 잠깐 잊고''' 비밀리에 미국에게 중국을 폭격해 줄 것을 요청한다. 상당히 친소적으로 중립을 유지하던 인도가 말이다! 미국은 위와 같은 이유로 태평양에 있던 [[미 해군]] 항공모함 [[전단(군대)|전단]]을 인도양으로 급파한다. 이는 소련 지도부에도 곧바로 전달되지만, 놀랍게도 소련은 인도를 '''이해'''해 주었다. 게다가 소련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벌이기 전까지 인도에게 군사적 원조를 지속할 정도였다. 소련에게 있어서도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닐테고, [[스탈린]]도 그러하였고 [[흐루쇼프|그 후계자]]도 중국을 소련의 우방으로 생각하지 않고 잠재적 적국이라 믿었다. [[마오쩌둥]]도 역시 중국이 소련의 위성국으로 취급되는 걸 원치 않았고 [[저우언라이]]를 필두로 미소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은 신생 독립국들의 리더로서 국제정치 에서 한 축을 담당하려 했다. 그리고 흐루쇼프가 표방하던 수정주의를 중국에선 대놓고 '''반동'''이라 욕했고 소련도 거기에 모든 지원을 끊는걸로 답했다. 이런 살얼음 판 같은 상황에서 두 공산권의 거두인 [[소련]] [[중국]]의 [[중소관계|관계]]는 [[중소분쟁|결국 완전히 깨지고]] 중국은 [[미국|원래 최대의 적]]과 [[핑퐁 외교|탁구]]를 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중국은 전쟁에서는 이겼음에도 오히려 대외적으로 불안해지는 상황을 우려했는지, 일방적으로 휴전을 선언하고 군대를 모두 철수한다. 심지어 붙잡은 인도군 포로를 조건없이 모두 석방하고, 무기와 차량, 탄약 등의 모든 압류한 장비들을 돌려주기까지 하였다.[* 다만 몇몇 차량은 전리품으로 챙겨가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스튜어트 전차|M3A3 스튜어트]] 한 량이 중국군에게 노획되었으나 이 개체는 반환되지 않고 중국 베이징 군사 박물관에 소장 중에 있다.] 1958년에는 [[중화민국]]과의 [[진먼 포격전]], 소련과의 이념갈등(실질적으로 누가 공산주의 국가들의 수장이 되는가 하는 싸움) 때문에 첨예한 대립이 시작되었다. 중국이 내부적으로는 1958년부터 무리하게 시작한 [[대약진 운동]]으로 식량난을 겪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서 인도와의 국경분쟁을 확대시킬 수 없던 입장이었다. 또한 위에서 지적했듯이 히말라야 산맥을 2,000km씩 끼고 있어 등짐과 야크에 의존한 보급이 어려웠던지라 더이상의 공세도 지속하기 어려웠다. 승전국 중국은 [[아크사이친]]을 차지했지만 [[아루나찰프라데시]]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일부 중국 네티즌들은 중국 정부를 다 삼킨 고기를 다시 뱉어내는 호구 정도로 인식하고 깐다. 어쨌든 승리를 거둔 시점에서 쓸데없는 욕심을 부리지 않고 현실을 정확히 판단해 멈춘 것은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현명한 일이었다. 또한 이후로 인도가 중인전쟁의 후유증으로 물가가 급속히 올라가고, 성장률 또한 3% 안팍으로 침체를 겪게되는데 이처럼 인도에 경제적 타격을 주면서 인도의 성장을 막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실패라고 볼 수 없었다. 물론 중국도 문화대혁명으로 사정이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 다만 1950년대와 60년대 당시 경제성장률 자체는 중국이 인도보다 훨씬 높았다. 이는 중국이 인도보다 지방행정력이 훨씬 강했기 때문에 경제계획에 온 자원을 집중할 수 있던 것이 컸다. 물론 이렇게 강력한 행정력이 독으로 작용해서 완전히 말아먹은 것이 [[대약진운동]]이었고, 이후에 경제성장률이 두자릿수대를 잠깐 찍게되나 마오쩌둥이 권력을 되찾기 위해 문화대혁명을 일으키면서 다시 사회가 혼란에 빠져 경제가 다시 침체되었다. 이후 회복은 되었지만 생활수준의 급속한 향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게 실질 경제성장률이 인도와 큰 차이가 없게 된 것은 물론이고 수천만명에 달하는 인명피해가 발생한 것은 덤이었다.] 그리고 중국-인도 국경선 전초기지를 기존 위치에서 20㎞ 후방으로 재배치, 인도와 더 이상의 국경분쟁을 원하지 않는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이것으로 중국-인도 양국간의 전쟁은 일단락을 짓는다. 그러나 아직도 인도와 중국의 국경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과제 중 하나이며,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인도와 중국 [[국경]]은 [[카슈미르]] 주처럼 미확정(점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더불어 중국은 [[악사이친]] 주를 비롯한 인도 영토를 손에 넣었다. (반중적인 입장에서 중국이 손해였다는 일종의 정신승리를 강조하기 위해) 이곳이 인구밀도가 희박해서 쓸데없는 곳을 점령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곁에서 파키스탄과 인도가 카슈미르에서 국경분쟁을 벌일 정도로 이곳은 전략적으로 요충지이다. 그리고 어차피 히말라야 지역 전역은 이곳과 마찬가지로 인구밀도가 희박하다. 그리고 인도가 1년후에 이곳이 점령당한 것을 알았다는 것은, 이곳이 쓸모없어서가 아니라 인도의 행정력이 그 정도로 허술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