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원대전 (문단 편집) === 장쉐량의 참전 === 장쉐량이 자꾸 참전을 거절하자 장제스는 봉천군을 분열시켜 일부만이라도 참전시키려는 시도를 하였다. 하성준이 마정복 등 봉천군의 여단장들에게 군비 300만원을 지급하여 중앙군에 투항하도록 획책하려 했지만 우학충에게 발각되어 마정복 등은 모두 체포되었다. 장쉐량은 장제스와 대립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일을 문제삼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산해관에 시찰을 나갔던 장쉐량은 8월에 이르러 반장군이 대거 붕괴되고 후퇴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게 되었다. 이에 장쉐량은 철로 문제 때문에 봉천으로 돌아가는 일정이 늦어졌다고 알린 다음에 산해관에 주둔한 동북군의 상태를 검열하였다. 8월 27일, 장쉐량은 대공보 기자와의 간담에서 3월의 화평통전 의사가 그대로라고 했지만 부사령관 취임 문제에 대해서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8월 30일 봉천으로 돌아온 장쉐량은 [[장쭤샹]], [[장징후이]], 만푸린, [[탕위린]] 등에게 남방관계에 대한 일을 상의할 것을 요청했다. 8월 31일부터 9월 2일까지 장쉐량은 만주 구파들과 회동, 만주 구파에게 길림, 흑룡강, 열하의 기반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하고 관내 진출에 대한 동의를 얻게 되었다. 9월 5일, 장쉐량은 장제스에게 자신은 베이핑 국민정부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해명했고 옌시산에게도 베이핑 국민정부에 참여할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9월 17일 장쉐량은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 난징 정부 아래 있지만 모든 것이 부합되는 것은 아니고 다만 중앙에서 난징으로 기울어져 있을 뿐이라고 대답하며 자신이 중립성향임을 강조하다가 바로 다음날인 9월 18일, 중앙옹호와 화평통전을 보내고 관내로 동북군을 진출시켰다. 동북군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관내로 진주했고 너무나도 손쉬운 진주에 옌시산과 장쉐량이 밀약을 맺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장쉐량은 동북군이 무력조정에 나선 것은 인민의 재난을 구재하고 진정한 화평을 이룩하는데 있을 뿐이라고 이러한 의혹을 일축했다. 그리고 베이핑 확대회의의 정치개혁 7개항에 대해서 긍정적이지만 일시에 실현될 수 없는 것이므로 당장의 내란을 방지하고 화평을 유지하는 것이 급선무라면서 자신이 완전히 장제스의 편이 아님을 드러냈다. 엔시산은 장쉐량의 중앙옹호 통전을 들은 9월 18일, 10일만에 주석에서 하야함을 타전하고 19일에 병력을 이끌고 산서성으로 철수했다. 왕징웨이 등 베이핑 국민정부와 확대회의도 타이위안으로 이동했다. 동북군은 신속하게 베이핑, 톈진으로 진주했다. 9월 22일 동북군이 베이핑과 톈진을 점령했고 25일에 바오딩에 이르렀다. 상황이 다소 진정되자 장제스는 10월 3일, 카이펑에서 국민정부에 전보를 보내 모든 정치범을 사면하고 관대한 정책을 실시할 것을 제안하는 한편 중집위에 전보를 보내 서둘러 4전대회를 소집하여 약법을 제정을 위한 국민회의 소집을 의안으로 다룰 것을 제안했다. 10월 9일 장제스는 비행기를 타고 난징으로 돌아갔다. 10월 15일 [[쑹저위안]]이 동북군에 투항되었고 이들이 29군으로 개편되었다. [[스여우싼]]도 장쉐량에게 항복, 국민혁명군 13로군으로 편제되었다. 어쨌거나 옌시산은 장쉐량이 완전히 중앙의 편이 아니라고 표명한 것에 대해 희망을 품고 각군에게 황하 이북으로 퇴각하고 정전을 실행하며 화평해결을 기다리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10월 5일 장쉐량의 화평 주장에 동의를 표하고 장쉐량의 후속 조치를 기대했다. 10월 9일 장쉐량은 중화민국 육해공군 부사령관에 취임했고 10월 17일 왕수상을 하북성 주석에 임명하고 10월 21일, 그에게 전권을 가지고 일을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국민정부는 장쉐량이 하북성 주석에 왕수상을, 평진위수총사령관에 우학충을 임명하고 독단적으로 하북을 지배하는 것에 큰 불만을 품었으나 10월 23일 장쉐량은 장제스가 자신에게 인사행정을 일임했다고 밝히며 자신의 행동이 중앙을 무시하는 일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10월 15일 장쉐량은 옌시산과 펑위샹에게 전보를 보내 이후 문제에 대해 의견을 구하고 10월 24일, 장쉐량은 동삼성간부회의를 소집하여 향후 문제에 대해 논했다. 그리고 10월 25일 옌시산과 펑위샹에게 10월 30일 이전에 봉천으로 대표를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등 여전히 호의적으로 옌시산과 펑위샹을 대했다. 그리고 [[한푸쥐]], [[스여우싼]] 등과도 접촉하는 등 중앙의 의사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는 장쉐량이 장제스가 자신과 옌시산, 펑위샹이 싸우게 하여 적대관계로 만든 다음에 어부지리를 얻으려 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10월 24일, 장제스는 펑위샹과 접촉하며 화북지방에서의 세력균형 회복을 꾀하기도 하였다. 이를 경계한 장쉐량은 10월 27일 우학충을 통해 서북군에게 사후 처리를 할 때 무조건 대표를 봉천에 보내 자신과 직접 상의하라고 알렸다. 한편 중앙군도 쾌속추격을 계속하여 10월 3일 카이펑, 10월 6일 정저우를 함락시켰다. 서북군 2만명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고 궁지에 몰린 서북군은 독가스까지 뿌리며 저항했지만 독가스를 제대로 다룰 줄 몰라서 풍향이 바뀌자 오히려 서북군이 큰 피해를 입었다. 중앙군은 10월 9일 뤄양을 점령하고 10월 25일 펑위샹의 사령부가 위치한 동관, 10월 29일 서안을 함락시키는데 성공했다. 뤄양이 함락되면서 손양성, 쑨롄중 등 서북군의 주요 장령과 15만에 달하는 서북군 주력부대가 포위되어 항복했다. 장제스는 10월 27일 장쉐량에게 중원대전의 처리를 조속히 처리할 것을 주문하고 10월 30일 장쉐량에게 통전하여 옌시산과 펑위샹을 국외추방하고 이들의 군사력을 재편해야 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장쉐량은 10월 29일 "군사방면에 속한 모든 일은 일체 중앙명령을 준수하고, 행정방면에 속한 것은 지방관리가 임명되고 행정기관이 개혁되면 역시 중앙명령에 따라 처리한다."고 발표하면서 중앙에 대한 복종의사를 드러냈지만 장제스의 장단대로 놀아날 생각은 없었다. 장제스는 10월 28일 [[우톄청]], 하성준을 시켜 우학충 회유에 나서는 등 동북군벌의 확대를 경계하는 태도를 드러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