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원대전 (문단 편집) === 옌시산의 장제스 하야 요구 === [[1930년]] [[2월 10일]], 지금껏 중앙 옹호의 입장을 보이던 옌시산이 장제스에게 하야를 요구했다. >"[[옌시산|나]]는 [[장제스|당신]]과 함께 물러나서 쉬고 싶다. 나라를 위해 타인에게 길을 양보하는 것은 중화민국 고유의 정신이며 야(野)에 있으면서 책임을 지는 것이 오늘날 유일한 구국의 길이다. 이는 겉으로는 부드러운 말이지만 실제로는 장제스에게 하야를 요구하는 반중앙의 요구였고 산서군은 이미 전쟁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장제스는 이에 대해 2월 12일 단호히 거부했다. >"현재와 같은 내우외환 때에 개인의 진퇴는 당의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 옌시산의 반장 태도에 [[왕징웨이]], [[천궁보]] 등 [[개조파]], [[셰츠]], 쩌우루 등 [[서산회의파]]가 평진 지역에 집결하여 옌시산에게 연일 반장을 부추겼다. 2월 20일, 중국국민당 중앙선전부는 <동포에게 알리는 글>을 발표하여 무력으로 반란을 일으키는 자를 토벌할 것이라는 결의를 내놓음으로 옌시산에 경고했다. 하지만 2월 21일, [[리쭝런]], 황샤오훙, [[바이충시]], [[장파쿠이]], 호종탁 등이 연명으로 장제스의 하야와 옌시산의 전국 육해공 총사령 취임을 요구했고 옌시산은 [[2월 23일]] [[펑위샹]], [[리쭝런]] 등을 규합하여 45명의 연명으로 국군의 재편견을 요구함으로 장제스에 대한 반기를 분명히 했다. 이로써 주요 반장세력이 모두 하나로 규합된 것이다. 3월 1일 장쉐량이 장제스와 옌시산 모두에게 분쟁 중지를 통전했다. 장쉐량의 화평 요구에 장제스는 화평통일을 원한다고 답전했으나 장제스는 3월 2일 장쉐량에게 보내는 답전에서 반동분자들이 당국을 배반한 일에 대해서는 부득이하게 무력으로 제재해야 하며 3월 1일 전체회의에서 위원을 파견해 진상을 조사하기로 결정했다면서 옌시산이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제스가 화평의 조건으로 내건 7가지 조건은 다음과 같다. * 1. 체포한 당원의 자유를 회복시켜 직권을 시행할 수 있도록 하라. * 2. 임의로 동원하여 타성을 범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 * 3. 산동, 하남 각 부대는 일정 기간에 철퇴하라. * 4. 중화민국군 명의의 임명은 취소하라. * 5. 진포선교통 및 경기지방 각 기관은 회복하라. * 6. 반동분자 왕파친(왕법근), 쩌우루 등은 추방하라. * 7. 옌시산은 개인은 성의를 가지고 의지를 표명하라. 3월 2일 옌시산도 장쉐량에게 통전하여 평화통일을 원한다고 답변했으나 말 뿐이었다. 장제스는 전쟁의 시작에 앞서 잠시 고민했다. >비록 현재의 상황에서 한 종류 혹은 다른 종류의 결합과 분열을 통한 몇몇 새로운 발전이 있기는 하지만, 어떤 전략을 수립하기란 어렵다. 저 사람을 상대하기 위해서 이 사람과 동맹을 맺는 일, 또는 이 사람을 상대하기 위해서 저 사람과 동맹을 맺는 일은 적절한 접근을 하기 위한 옳은 방법이 아니다. >---- >1930년 3월 5일, 장제스의 일기. 하지만 곧 장제스는 3월 8일, 옌시산을 토벌할 뜻을 다짐했다. >이미 반역한 자로서 귀순하지 않는 자, 반복이 무상한 자에 대해서는 주저할 것이 없다. 이런 무리는 이른바 신의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다. 상대가 갑이든 을이든 그 한쪽과 손을 잡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끼리 싸우게 두는 편이 낫다. 나는 단지 내부를 정리하여 병력의 보충을 꾀하거나 갑을 모두 귀순, 복명시켜 반항하지 않도록 할 따름이다. >---- >1930년 3월 8잉, 장제스의 일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