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원대전 (문단 편집) === 옌시산과 펑위샹의 하야 === 11월 3일 쩌우루, 셰츠, 왕징웨이 등은 타이위안을 빠져나와 도주했고 11월 4일, 옌시산과 펑위샹은 베이핑 국민정부와 확대회의를 해산하고 석권귀전, 즉 권력을 포기하고 시골로 돌아간다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장제스는 이를 신뢰하지 않고 11월 5일 "옌시산, 펑위샹이 완전히 하야할 의향이 없는 것이 확실한데, 만약 그들이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하면 산서 및 서북을 철저히 해결하기 위해서 무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장쉐량에게 통고했다. 그리고 11월 6일 황하 이북 각 성의 군정전권을 장쉐량에게 위임할테니 서북을 공격의 총지휘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이쯤되자 류원후이를 비롯해서 일시적으로 반장파를 편들었던 군벌들도 다시 장제스에게 고개를 숙이고 잘못했다고 싹싹 빌면서 입장을 선회해버렸다. 장제스가 여전히 무력대응으로 나서자 당황한 옌시산은 긴급군사회의를 소집하여 펑위샹에게 섬서로 돌아가 방무를 철저히 해줄 것을 요청하는 한편 장쉐량에게는 정치적 해결을 촉구했다. 또한 옌시산은 대세에 순응하여 공직에서 하야하고 서북군의 군정대권을 펑위샹에게 위임한다는 뜻을 밝혔으며 펑위샹은 섬서, 산서의 방무를 점검하여 향후 방향에 대해 논의했다. 우학충은 만약 전쟁이 재발하면 이는 난징정부의 책임이라고 주장하며 장제스를 압박했고 장제스는 자신과 펑위샹이 결탁했다는 소문이 도는 가운데 장쉐량이 무력대응에 완강히 반대하자 난처한 입장이 되었다. 장제스는 11월 2일, [[후한민]] 등을 파견하여 장쉐량에게 2천만원을 지급하고 동북의 요인을 국민정부의 요직에 임명하겠다고 제안했다. 장쉐량은 향후 개최될 4전대회에 참가하여 동북의 이익을 확실히 쟁취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왕수상에게 이를 위한 계획서와 건의서를 작성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우학충에게 고급 간부 10~20명을 선발해 타이위안 등 각 지역에 파견해 각지 주둔군 명칭, 병력, 장령의 태도를 조사하고 산서의 군대 규모, 경제, 정치 상황을 조사해 보고할 것도 지시했다. 이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장제스와 직접 협상하려 했던 것이다. 11월 12일 난징에 도착한 장쉐량은 4전대회에 참여하여 장제스와 직접 회담했다. 장제스는 무력토벌을 주장했지만 장쉐량은 중앙군이 황하 이북으로 진주하면 안된다고 주장했으며 자신의 황하 이북에 대한 지배권을 요구했다. 장쉐량이 만약 무력토벌을 하고 싶다면 중앙군이 직접 해야 할 것이라고 밝히자 장제스는 큰 불만을 드러냈다. 하지만 장쉐량의 태도가 완강하여 장제스는 장쉐량에게 산서성 주석 등 지방장관 직의 추천을 맡기고 서북의 장쉐량의 관할범위로 귀속시키자고 제안했다. 이에 장쉐량은 인민을 안심시키기 위해 각 성의 주석을 산서 장령 가운데 선발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논의가 길어졌지만 결국 북방의 군정이 장쉐량에게 위임되고 장쉐량은 중앙의 뜻을 받아들여 중앙을 확고히 옹호할 것을 밝혔다. 합의에 따라 펑위샹, 옌시산은 국외로 추방하고 동북변방군을 중앙국방군으로 개편하며 동북에 당부를 설치하게로 했다. 11월 18일 제도개선, 정치쇄신, 공산당 토벌을 선언한 후 4중전회가 폐막되자 11월 20일, 장제스와 장쉐량은 연명으로 중앙에서 옌시산의 추방을 결의했으며 하루빨리 외유할 것을 촉구했다. 장쉐량도 자신의 추방에 동의하고 부하들까지 나가야 한다고 하자 옌시산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 12월 1일 하야할 것을 표명하고 변장한 후 톈진의 조계지를 거쳐 [[관동군]]이 지배하는 [[다롄]]으로 망명했다. 펑위샹도 산서성에서 도주하여 산동반도의 [[태산]]에 은거했다. 왕징웨이도 11월 중순 홍콩으로 도주했다. 왕징웨이는 12월 27일, 장제스에게 타격을 주고 자신에게 우호적인 여론을 확보하고자 태원약법의 초안을 선포하였는데 베이핑 국민정부에서 기초한 태원약법은 8장 221개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대단히 민주적이고 현대적인 법률이라 중국 헌정사에 큰 족적을 남겼고 장제스의 훈정에 인권보장의 법제적 기초가 결여되었다던 [[후스]] 등 자유주의 지식인들의 비판을 계속 받고 있던 장제스가 국민회의 소집을 통한 약법 제정에 나서게 되는 한가지 기폭제로 작용, 후일 [[장호합작]]의 파국까지 이어졌다.[* 이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중화민국 전 국무총리 [[슝시링]] 등이 1차 헌정운동을 벌여 국민정부를 거세게 비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