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앙중학교(서울) (문단 편집) === 개교기 (기호학교 ~ 중앙학교) === 開校期, [[1908년]] ~ [[1916년]] [[1908년]] [[6월 1일]], 애국계몽을 위한 교육단체인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서 '''기호학교(畿湖學校)'''를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6월 20일]] 교원 양성을 목표로 하는 사범교육과정의 '''특별과'''와 20세 이상 한문에 능통한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중등교육과정의 '''본과'''로 구분되어 기호학교가 개교하였다.[* [[2007년]]까지는 [[6월 1일]]이 기호학교 설립안 가결일이기 때문에 '[[개교기념일]]'로 정하였으나, [[2008년]] 개교 100주년 기념식 때부터 [[6월 20일]]로 복원하기로 결정하여 [[6월 20일]]로 바뀌게 되었다.] [[1908년]] 입학한 95명의 학생들은 [[9월]]에 모집한 후학기(後學期) 학생들을 포함하여 200여 명에 달하게 되었다. 교육과정은 지리·역사·산수·법학·경제·음악·체조 등으로 하였으며 특별과는 1년 6개월로, 본과는 3년으로 수업연한을 정하였다. 이 기호학교의 자리는 오늘날의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써 [[소격동]]의 [[대한제국]] 육군위생원 건물이었으나 [[1908년]] [[12월 5일]] 후학기 학생들로 인원이 초과되자 당시 초대 윤효정 교장의 뒤를 이은 방승봉 교장이 화동(花洞) 교사로 이전하게 되었다.[* 이 화동 교사는 김성수 계열 법인들([[동아일보]],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등)에게는 큰 의미가 있는 곳으로 기호학교와 중앙학교가 사용하다가 김성수의 중앙학교 인수 직후 학교가 계동으로 이전되면서 자리가 비었다. 그래서 [[1920년]]에 창간된 [[동아일보]]가 이곳을 사옥으로 썼다. [[http://map.naver.com/?vrpanotype=3&query=7ZmU64%2BZIDEzOC0yNg%3D%3D&searchCoord=&street=on&menu=location&tab=1&vrpanopoi=off&vrpanolng=e76a405a1ecfdca9984bbce69d1bb809&lng=1210d088442a11cf4ae4ee269f18ac69&__fromRestorer=true&mapMode=0&vrpanofov=100&vrpanoid=wqfrbXX85aY1TijAdT7fAg%3D%3D&vrpanopan=26&mpx=37.5753028%2C126.973759%3AZ11%3A0.0344565%2C0.0138173&vrpanosky=on&vrpanolat=ef75a356cc3d63b2458caf0b37794a09&vrpanotilt=-15.83&dlevel=14&lat=72f9a792421156dc7ee94b190374c509&enc=b64|위치는 이곳.]] 로드뷰에서 앞면이 안 보이는 작은 비석이 기념 표석이다. 그런데 잘 보면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 시행 이전 중앙고의 가장 큰 라이벌이었던 [[경기고등학교]] 구 교사의 바로 앞이다! 물론 중앙고가 한참 전에 이전하여서 크게 상관은 없지만 참 오묘하다.] 기호흥학회는 기호학교를 통해서 기호지방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의 학교들과 밀접한 교류를 통해 [[교육]]을 통한 애국계몽과 근대화를 추진하였고, 특히 [[충청도]]의 다수 향교, 학교들과 교류가 이뤄졌다.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로 망국이 되면서 기호흥학회 역시 다른 애국계몽운동 단체들과 함께 [[조선총독부]]로부터 '''해산''' 처분을 당하였다. 이러한 총독부의 결정 이후 기호흥학회는 [[1910년]] [[9월 11일]]에 의욕적으로 [[유길준]]과 그가 이끌던 [[흥사단]]이 창립한 '''융희학교(隆熙學校)'''를 흡수·통합하였고 이는 지금의 '''중앙중·고등학교'''의 시초가 되었다. 이어 [[1910년]] [[11월 22일]], 기호흥학회가 전국 각지의 지방 학회와 통합하여 새로이 중앙학회(中央學會)를 창립하였으며 교명 역시 '''사립중앙학교(私立中央學校)'''로 바꾸게 되었다. '중앙'이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된 것으로, 다른 지역의 수많은 '중앙'중학교, '중앙'고등학교들과 달리 서울에 있는 [[중앙중학교]]에 지역 이름이 붙지 않는 이유이며, 이름에 걸맞게 학생 역시 전국 13도에서 골고루 지원받았다. 더불어 [[중앙고등학교 야구부]]도 이 때 창단되어 100년이 넘도록 재창단 없이 이어지고 있으며, 육당 [[최남선]]이 작사한 '''교가'''도 [[1914년]] [[7월 24일]] 만들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총독부는 끊임없이 민족 교육을 방해하고, 계몽운동을 막기 위해 '사립학교 인가제' 등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였다. 특히 [[1911년]]에는 [[조선교육령]]의 공포를 통해 적극적으로 민족사학의 육성을 방해하고자 하였다. 중앙학교 역시 ''''사립학교규칙'''' 등의 적용으로 운영이 크게 어려워졌다. 이에 따라 중앙학회의 회장이었던 [[김윤식(조선)|김윤식]][* 역시 [[인촌 김성수]]와 마찬가지로 친일 행위가 있었으나 이 사람은 [[3·1 운동]]에 [[이용직]]과 함께 참여하여 [[친일반민족행위자]] 목록 등지에서는 제외되었다.]은 학교를 안정적으로 인수하여 경영할 사람을 찾아다녔고, 그 끝에 만난 사람이 바로 '''[[김성수(1891)|김성수]]'''였다. [[김성수(1891)|김성수]]는 원래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얻어 백산학교(白山學校)라는 다른 학교를 세우고자 하였으나, 당시 민족 사학의 세력 확장을 우려하던 총독부의 강경한 거부로 결국 실패하였다. 그런 김성수에게 김윤식이 제안한 '중앙학교 인수'는 상당히 솔깃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김성수는 [[전라북도]] [[부안군]]의 재력가인 양부(養父) '''원파 김기중''' 선생에게 중앙학교의 인수를 위한 자금 지원을 요청하였다. || [[파일:계동 중앙고등학교 (1917년경).jpg|width=100%]] || || {{{#ffd700 '''중앙중학교 계동 교사 (1917년 경)'''}}} || 생부(生父)인 김경중과 거의 대부분의 가족들은 크게 반발하였으나, 김기중만이 그의 편을 들어주며 인수를 돕고자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915년]] [[4월 27일]]''', 24살이라는 젊은 나이의 김성수가 김기중·김경중 두 아버지의 지원을 받아 '''중앙학교'''를 인수하게 되었다. 이 인수를 통해서 많은 것들이 변하게 되었다. 고향의 많은 땅을 팔고 김기중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으며 김성수는 지금의 중앙학교 자리인 '''[[계동]]''' 1번지 땅 '''4,000여 평'''을 사서 학교를 건설하게 되었다. 사실 김성수의 계동으로의 이전은 '고등보통학교령'이라는 일제의 교육방침에 대응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이 법령에 따라서 모든 고등보통학교는 총독부의 인가를 받고, '4개년'으로 운영되어야 한다는 것이 골자였는데 이는 턱없이 작은 화동 교사에는 4개 학년의 학생들을 수용하기에 벅찬 규정이었다. 그래서 김성수는 하루 빨리 넓은 부지로 새롭게 건물을 지어 학교를 이전하고자 한 것이다.[* 실제로 김성수를 도왔고, 후에 [[동아일보]] 사장과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장을 맡기도 했던 [[송진우(독립운동가)|송진우]]는 학생들의 등교에 불편하고 학교 발전에 지장이 있다며 불평을 하긴 했으나 김성수는 '나중에 이 앞에 집들이 들어서면 괜찮다'며 강행하였다. ~~송진우가 옳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