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국권법 (문단 편집) == 발전사 == 일반적으로 중국 무술의 발달은 근대 중국의 사회상과 맞물린다. 만주족이 한족을 다스렸던 청대엔 당연히 [[민간인]]의 무술연마를 금지했다. 하지만 각종 [[비밀결사]]는 몰래 [[무술]]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이것이 오늘날 말하는 [[문파]]의 기원이 되었다. 무엇보다 이들의 경우 공권력의 눈을 피해야 했기 때문에 들키기 쉬운 대형 장병기보다는 은닉하기 쉬운 암기를 이용한 기술이나 맨손 박투술을 보다 중점적으로 가르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19세기 말 [[의화단]]의 무장봉기가 열강의 총구 앞에 맥없이 무너지면서, 권법은 전투기술로서의 가치를 크게 상실한다. 게다가 이후 [[국공내전]]과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상당수의 전통 계승자가 잠적하거나 해외로 도피하면서 대륙에서 권법의 위세는 크게 쇠했다. 중국 공산당이라고 처음부터 권법을 탄압한 것은 아니다. 쿵푸와 우슈 진흥에 꽤 신경을 써서 우슈를 체육대회 종목으로 편성했고, 1960년대에 학교에서 우슈가 과목으로 편성된적도 있었으며 자격증 제도도 도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이 닥쳐오면서 쿵푸도 그 바람에서 피하지 못했다. 홍위병들이 전통무술이나 사제관계 등이 봉건적이고 구태의연한 구습이라며 떼로 몰려가 다 때려 부수기도 했고, 상당수 고전 무술서적들을 태우기도 했다. 당연히 무술수련하는 사람들은 날벼락을 맞은 격이라 세간의 눈을 피해서 음지에서 수련하든가, 권법을 그만두든가 하는 양자택일을 해야만 했다. 운 좋게 몸을 건사한 사람들은 문화대혁명이 끝나고나서 권법을 복원할 기회라도 얻었지만, 맞아 죽거나 폐인이 되는 경우도 다반사였고, 이 때문에 많은 권법이 난리통에 실전되었다. 현대 중국의 상당수 중국권법은 대만이나 홍콩 등에 사는 화교들이 전승하여 살아남은 무술이 역수입된 것이다. [[문화대혁명]] 때 많은 권법이 실전됐다는 사실을 두고 오늘날 중국권법이 명성에 비해 실전에서는 형편없는 점에 대한 핑계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확실히 이때 홍위병은 정말 집요하고 정신병적인 반달리즘을 저질렀기에 많은 권법이 실전된 정도가 아니라 중국권법이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파괴행위를 벌였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의 광기가 사그라들고 중국이 개혁개방의 길로 접어들면서 중국무술은 구태의연한 구습에서 중국의 자랑거리로 위상이 급변했다. 이 당시에 홍콩영화가 세계적으로 히트를 치면서 쿵푸도 덩달아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쿵푸 파이팅]]이 1974년도 노래이다.] 이렇게 쿵푸의 인기가 높아짐을 보고 중국 정부는 덩샤오핑으로 정권이 바뀌었음을 계기로 전통문화 진흥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대대으로 전통무술 진흥 정책을 추진하고[* 공묘 등 문화재 복업작업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완벽한 고증이 어려운 경우에는 얄짤이 없었고, 초창기에는 상업화와 무지로 엉터리 고증이 넘쳐 홍역을 치르기도 했으며, 부동산 붐으로 상당수의 고택들이 재개발 명목으로 여전히 철거되는 등 이쪽도 나름대로 험난한 길을 걸어야 했다.] 사라질 뻔했던 무술 상당수가 복원작업을 거치거나 복원되었고, 각 지역별로 무술협회들이 설립되었으며 무술대회도 대대적으로 열리며 주목받았다. 또한 무협드라마와 영화 촬영을 통한 지역 관광산업 진흥이나 건강관리 및 [[호신술|호신용]], [[사교육]] 등 상업적인 용도로 다양하게 써먹기 좋았기 때문에 각 지방정부에서도 무술진흥에 신경을 쓰자 무술 수련자 수도 자연히 급속히 증가했다. 돈이 있는 곳에 파리가 꼬임은 당연해서 이번에는 입문자를 현혹해서 돈을 벌어먹으려는 사이비 권법가들이 대거 등장하여 골머리를 앓기도 했다. 물론 이렇게 상업화 열풍에 동참하기는 [[소림사]]를 비롯한 기성 무술계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중국 내외에서 욕을 많이 먹기도 했다. 어쨌든 개혁개방 초창기에 난립하던 사이비 단체들이 옥석 가리기로 줄어들면서 어느 정도 정화되기는 했지만, 지금도 무술들의 폐쇄성으로 인한 기량 저하 따위 문제점이 지적되어서 이를 개선하려는 노력도 있기는 하다. [[무협소설]]에 등장하는 것과 달리 실상 수백 년 독자성을 간직한 문파 따윈 없다. 오히려 기술이나 전승과정을 추적해보면 이종교배 현상이 두드러지는데, 즉 오늘날의 종합격투기가 발전하는 양상과 다를 바가 없다. 물론 높은 접근성과 인프라를 갖추고 지속적인 교류를 벌이는 현대격투기에 비하면, 중국무술은 극단적으로 폐쇄적인 자세를 취했던 것이 사실이며, 이것은 나쁜 방향으로 발전하여 허무맹랑한 신비주의가 되거나 무의미하게 족보나 팔아먹는 한심한 결과를 불러오기도 했다. 사실, 중국권법이 (후술할) 일종의 문화 아이콘으로 소비되는 현대에는 수백 년 독자적 전통이나, 신화적인 창시자와 같은 개념이 흥미로운 '''설정'''으로 호사가의 관심을 끌기 쉽지만, 이러한 권법이 실제로 창시되고 활용되던 당시에는 실용성이 훨씬 중요한 문제였다. 현대에는 실용적인 목적보다는 취미나 건강, 자기수양 등 이유로 권법에 접근하는 사람이 많고, 이런 사람이면 흥미로운 설정에 관심을 기울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권법이 자신의 생명과 안전, 재산,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이던 시기에는 당장 기술을 개선하고 강화하는 게 중요했다. 근대 이전의 중국무술이 '극단적으로 폐쇄적인 자세'를 취한 것 역시, 문파의 전통과 같은 추상적인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기술이 외부로 유출되어 경쟁자에게 대처법이 알려지고 장기적으로는 경쟁자의 기술개선에 사용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봄이 더 적절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