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국국민당 (문단 편집) == [[/역사|역사]]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중국국민당/역사)] 194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형식적인 연립 여당이자 실질적인 독재 정당이었다.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은 3당 훈정의 여당. 그러나 1980년대 [[장징궈]] 총통 시절부터 점차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장징궈는 1984년 대만 출신인 [[리덩후이]](이등휘/李登輝)를 부총통으로 앉히고, 죽기 몇 달 전에는 '내가 대만에서 40년을 살았으니 나도 이제 대만인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말했다고 한다. 1988년 장징궈가 사망하자 총통 및 당 주석 직을 이어받은 리덩후이는 언론 통제 폐지를 단행하였고, 보수파의 반발을 제압하면서 국민대회와 입법위원의 총선거도 시행하였으며, 1996년에는 총통 직선제를 시행해 대만 민주주의를 정착시켰다. 1993년 이에 반발한 국민당 내의 외성인 출신 의원들이 대거 탈당하여 [[신당(중화민국)|신당]]으로 분당되는 사태를 겪었지만, 어쨌거나 지속적으로 의회 과반수를 확보하면서 위기를 넘겼다. 중국이 96년 선거에서는 무력 시위까지 하면서 리덩후이의 3선을 막으려고 했지만 되려 대만 독립파들의 지지를 얻으면서 '''당선에 도움이 되었다'''. 당시 국민대회 선거결과를 보면 국민당이 49.7%, 민진당이 29.9%의 득표를 보였는데 총통 선거에서 리덩후이가 54.0%, 펑밍민 후보가 21.1%의 득표율을 얻었다. 결국 신당이나 무소속을 지지한 후보가 총통선거에서 25%, 국민대회 선거에서 5%의 득표를 얻었으니 갭이 좀 있다 하더라도 약 8%의 민진당 지지표가 리덩후이로 날아간 셈이 된다. 2000년 총통 선거를 앞두고 리덩후이의 지지를 받은 부총통 [[롄잔]]이 국민당 총통 후보가 되었다. 그러나 [[쑹추위]]가 이에 반발하여 탈당, 독자 출마하면서 렌잔 후보는 3위에 머물렀고, [[민주진보당]](민진당)의 [[천수이볜]](陳水扁)이 총통으로 당선되면서 국민당은 정권을 민진당에게 넘겨준다. 이후 2001년 총선에서도 국민당은 개헌 저지선 확보에 실패하는 참패를 당하고 만다. 천수이볜 정부가 난맥상을 보이고 롄잔과 쑹추위가 서로 화해를 하며 단일화를 결의하여 2004년 총통선거에서 우세를 보일 듯했으나, 전날 일어난 석연찮은 천수이볜 암살미수 사건으로 정권 탈환에 실패했다. 그러나 이듬해 총선에서 개헌저지선을 확보했고 뒤를 이어 지방선거에서도 기여코 압승을 거두며 천수이볜을 궁지에 몰아놓았다. 그리고 2008년 총선에서도 압승을 거두고 그 뒤를 이은 총통선거에서도 [[마잉주]] 후보가 당선되어 기어이 정권 탈환에 성공한다.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중국]] 대륙에 경제 협력에 한해 우호적인 성향[* 단, 정통 중국이 어디냐 하는 문제에서는 '중화민국 = 정통 중국'이라는 입장을 고수하며, 중화인민공화국이 주장하는 일국양제로 대만을 복속시켜 통일하는 것에 단호히 반대하고 있다. 실제 마잉주 총통이 이끄는 국민당 정권은 이와 관련해 [[2014년 홍콩 우산 혁명|2014년 홍콩 시위]]에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을 보이고 있었는데, 09년 12월에 있었던 지방선거에서 이전보다 부진하면서 다시 흔들리는 형국이다.[* 17개 선거구 가운데 국민:민진이 14:3이었던 것이 12:4가 되었다. (한 석은 무소속) 민진당의 득표율이 45.32%로 국민당(47.88%)이 우세지만 2005년의 선거(민진당 38.2%)에 비하면 대단한 약진이라서 패배로 받아들여진다고. 재밌는 것이 지지율 하락 원인이 부패와 경기 침체, 그리고 '''미국산 소고기 수입제한 완화'''였다고 한다.] 이어서 벌어진 2010년 1월의 입법위원([[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도 3:0으로 전패, 민진당이 30석을 차지하면서 개헌안과 총통 파면안 제출에 필요한 총의석(113석)의 1/4(29석)을 넘어섰다. 이어진 2월 말의 보궐에서도 4석 가운데 3석을 내주었다. 이를 돌파하고자 했는지, 아니면 무릅쓰고 했는지 마잉주 정권은 같은 해 7월 중국과의 [[ECFA]]([[경제협력기본협정]])까지 체결시키면서 대외적으로는 "차이완(Chiwan) 시대"를 열었다고 홍보했으나 국내 반응은 냉담했다. 의회에선 난투극이 벌어졌고, 수만명의 시위가 빗발쳤다(리덩후이도 함께 참여했다). 11월로 예정된 5대 시장선거에서도 참패 전망이 우세했으나 의외로 선거 결과는 국민당의 승리. 선거 막판에 국민당 중앙위원이 총에 맞아 다치는 사고로 국민당 표가 집결하면서 다섯 곳 중에 세 곳을 차지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전체 득표에서는 민진당이 49.9%(377만 2,000여표)를 차지해 국민당의 44.5%(337만 9,000여표)를 5.4%포인트 앞섰다. 이러한 위기감 속에 실시된 2012년 총통선거와 입법위원선거에서 국민당은 선거 레이스 내내 근소한 차이의 우세를 보여왔으나, 언제든지 역전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표출되었다. 하지만 독립 노선을 지향하는 민진당의 집권을 원치 않았던 중국의 지지와 대만해협에서의 대립관계를 원치 않는 미국의 암묵적 동의 등이 겹쳐져 예상보다 손쉽게 재집권에 성공하였다. 허나 이후 마잉주 정권 지지율은 20~30%대에 머무는 등 난맥상을 보이고 있다. 이런 난맥상이 이어지면서 지지율이 계속해서 낮은 수준에 머무르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2014년 홍콩 민주화 시위가 좌절되면서 자칫했다가 중국에게 흡수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까지도 겹쳐 결국 지방선거에세 대패하고 말았다. 타이베이 시장을 친 민진당 성향의 무소속 후보에게 내줬고, 거기에다가 당초 국민당 후보가 승리할 걸로 보였던 타오위안 시장도 민진당이 가져간데다가 역시 국민당이 여유있게 승리할 것으로 보였던 신베이 시장도 접전 끝에 겨우 승리할 정도였다. 게다가 한국으로 치면 [[옹진군(인천)|옹진군]]에 해당하는 텃밭 [[진먼]]을 아예 무소속에게 내주었으며 [[펑후]]도 민진당이 가져갔다. 전체적인 판세를 본다면 국민당은 6개 시장 선거 가운데 딱 한 곳만 건졌고, 현장과 현급 시장은 그나마 사정이 낫다고는 하지만 5곳만 건졌다. [[2014년]] [[12월 3일]] 마잉주 총통이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국민당 주석직을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4/12/03/0200000000AKR20141203129700089.HTML|사퇴했다]]. 2015년 1월 18일에 [[주리룬]] [[신베이]] 시장이 당 주석에 당선됐다. [[2015년]] 7월 19일 총통선거 후보로 [[훙슈주]](洪秀柱) [[입법원|중화민국 입법원]] 부원장(국회부의장)[* [[국회의장]]은 [[왕진핑]]이다.]을 지명하여 선거 태세에 돌입했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7191701341&code=970204|#]] 이 사람이 여성이고 야당인 [[민주진보당]]도 여성인 [[차이잉원]] 주석을 총통 후보로 지명했기에 차기 대만 총통은 여성이 될 것이 거의 확실해졌다. 다만 훙슈주가 차이잉원에 비해 여론조사 등에서 조사한 지지율이 10~20% 정도 밀리고 있어 이를 어떻게 극복할지가 관건이다. 심지어 훙 후보는 지지율이 [[쑹추위]]에게도 밀리는 3위일 때도 있었다. 결국 [[2015년]] 10월 17일 초유의 후보 교체가 이루어졌다. 현 [[주리룬]] 주석을 후보로 교체한 것이다. 국민당이 최후의 수를 두었다는 평가가 많다. 현 홍슈주 후보가 워낙 인기가 떨어지는 것으로 인해 2위 자리까지 위태롭게 되자 내린 선택으로 보인다. 그리고 주리룬 주석의 출마로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는 쑹추위 후보와의 단일화 협상도 급물살을 살 것으로 보였지만 결국 쑹추위는 단일화를 거부했다. [youtube(JkbnKfTdO5E)] 중국 국민당 홍보 광고. 결국 2016년, [[제9대 대만 입법위원 선거]]와 [[제14대 대만 정부총통 선거]]에서 대패하였다. 이에 과반수를 넘긴 민주진보당은 9천억 원에 달하는 중국 국민당 재산의 국유화를 시도하기로 결정했다. 민진당 주석이자 차기 총통인 [[차이잉원]]까지 공개적으로 언급하며 강한 의지를 드러내는 상황이다. 이에 국민당측은 모든 재산은 합법적으로 취득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http://www.edaily.co.kr/news/NewsRead.edy?SCD=JF31&newsid=04408326612547240|기사1]]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01/19/0200000000AKR20160119219200072.HTML|기사2]] 중화민국은 상당기간 중국 국민당이 좌지우지하는 독재국가였고, 중국 국민당이 타이완 언론계의 큰 손으로 군림하기도 해서 장제스 독재정권 시절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지상파 방송사인 [[중국 텔레비전|CTV]]와 관영지인 [[중앙일보]]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CTV는 2000년대 초 이후에 케이블 방송에게 발리면서 재정이 급속히 악화되었고, 중앙일보는 1966년 복간[* 창간은 1928년이었으나 국부천대로 발행이 중단되었다.] 이후에 1980년대까지 대만 제1신문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역시 1990년대 민주화 바람으로 여타 신문사에게 밀리면서 재정이 악화되었다. 그래서 2000년대 중반에 죄다 처분한 상태다. 사실 중국 국민당은 일개 정당이라고 하기에는 비정상적으로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는데, 공식 발표만 해도 역대 최고액이 918억 위안이고 2015년 기준 7억 6,000만 달러('''약 9,169억 원''')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범록연맹]]에서는 국민당의 보유 자산이 실제로는 3~4조원대에 이른다고 주장하고 있다. 2016년 초 중화민국 내정부(내무부)는 국민당 재산이 2조 8천억 원 정도라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것은 [[중화민국]] [[정부]]와 중국 국민당이 분리된 것이 [[1991년]]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 혁파 때이기 때문이다. 2016년 기준 중국 국민당이 보유한 자산은 [[대만일치시기]]가 끝나면서 [[1945년]]에 [[대만총독부]]에서 중국 국민당이 넘겨받은 자산[* 당시는 아직 훈정시기라서 중국 국민당이 중화민국을 통치하고 있었다. 그래서 헌법 제정 전이므로 국민당이 '''당 자격으로''' 대만총독부의 자산을 압류한 것. 중화민국 정부와 중국 국민당은 사실 거의 비슷하기는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별개의 채제다. 예를 들어 193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특무조직은 중국 국민당이 직접 다스리는 기관이라서 중화민국 정부가 개입할 수가 없었다.]을 기초로 하고 있다. [[1946년]]에 [[대만 헌법|중화민국 헌법]]을 입법하면서 중화민국 정부와 국민당이 잠시 분리되나 얼마 안 가 [[국공내전]]의 패색이 짙어지자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을 입법하면서 헌정을 변칙으로 유지하다가 전황이 나빠지면서 중단하고 말았다. 그 상황에서 [[국부천대]]가 일어나면서 중국 대륙의 재벌이나 상류층들이 보유한 자산을 국민당에 넘겼고[* 1949년 중순 [[난징]]이 함락당한 이후 중화민국 정부는 무력화되었고, 타이베이에 들어온 중앙정부가 기능하기 전까지 역시나 대만총독부 반환 직후처럼 중국 국민당이 중앙정부의 기능을 임시로 대행했다.] 이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 체제에서는 당정군의 일체화(중화민국 정부+중화민국 국군+중국 국민당)가 더욱 심해져서 국민당의 자산을 중앙정부에 넘기지 않게 되었다. [[1991년]] 동원체제 혁파 당시 총통은 '''국민당 소속'''의 [[리덩후이]]였고 결국 국민당이 가지고 있던 재산을 정부에 넘기는 것은 아예 밀려버리고 만다. 국민당 정권이 민주화를 추진하면서 이 부분은 은근슬쩍 넘어간 것이다. 2016년 들어서 차이잉원 차기 총통과 민주진보당 측에서 국민당 자산의 국고 환수를 주장하는 것은 이런 배경이 있다. [[2000년대]] [[천수이볜]] [[민주진보당]] 정권에서 한 차례 환수 논의가 있었으나 민진당이 입법원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해 법안 성립은 불발됐고 대신 국민당이 [[CTV]]와 중앙일보, 몇몇 [[호텔]]들을 처분하는 선에서 타협이 이뤄지고, [[2008년]] [[마잉주]] 정부에서도 일정 부분 국민당 재산이 처분되기는 했으나 '''여전히 국민당 재산은 어마어마하게 많다'''. 국민당이 소유한 [[부동산]]에서 나오는 임대수익만 해도 [[민주진보당]], [[친민당]], [[대만단결연맹]], [[시대역량]] 등 다른 [[정당]]들의 총 수입을 합친 것을 가볍게 능가할 정도니 말 다 했다. 이후 차이잉원이 총통에 당선되면서 자산 상당수를 몰수당할 위기에 처했다. 더군다나 의회도 민진당이 압도적으로 과반을 차지하고 있기에 실현 가능성도 큰 편.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03/12/0200000000AKR20160312048200089.HTML|기사]] 국민당 내부에서도 자산을 정리하자는 개혁 목소리가 있긴 하다. 결국 3월 14일부터 입법원에서 국민당 자산에 대한 조사에 들어간다. 당연히 국민당 내부에선 이건 정치 보복이라면서 결사반대하고 있지만, 몇몇 원로들은 이 기회에 당 자산을 깔끔하게 국가에 헌납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국민당의 차세대 주자였던 [[주리룬]] [[신베이]] 시장(2016년 총통 후보) 역시 대선 유세전 당시 국민당 자산의 처분과 국민당의 회계감사를 통한 투명한 재정구조 확보, 문제 자산은 국고 환수 또는 원주인 반환을 [[공약]]한 바 있다. 이 와중에 리덩후이 총통 시절 당 자산의 일부가 헐값에 매각되면서 거액이 사라졌다는 폭로까지 나왔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3252133415&code=970204|관련기사]] 3월 26일, [[훙슈주]]가 신임 주석에 취임했다. 이는 국민당 역사상 최초로 여성 당수가 취임한 것이다. [youtube(fPzrYVOru2s)] [youtube(59oVd38PObQ)] [[2016년]] [[7월 26일]] [[입법원|중화민국 입법원]]에서 기어이 [[민주진보당]]과 [[시대역량]]의 전원 찬성으로 국민당의 당 재산을 [[중화민국]] 국고로 강제 귀속시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07/26/0200000000AKR20160726056300009.HTML|기사]] 국민당은 강력히 반발하고 원내 시위까지 했으나 법안 통과를 저지하지는 못했다. 민진당과 시대역량을 합쳐서 74명이고 여기서 [[쑤자취안]] 입법원장 한명 뺀 73명 전원이 찬성표를 던졌으니 [[친민당]]은 기권했다. [[2016년]] [[8월 27일]] [[화롄]] 시장 보궐선거에서 국민당 후보가 승리했다. 2010년 이후로 지방선거에 승리한 것은 오랜만의 일이라 국민당 내부에서는 2018년 지방 총선도 노릴 만하다는 분위기가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08/29/0200000000AKR20160829138500009.HTML?input=1195m|관련기사]] 2017년 5월 20일. 주석 대표 선거에서 홍슈주를 꺾고 우둔이 전 부총통이 당선되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4&oid=001&aid=0009279326|관련기사]] [[2018년 대만 지방공직인원 선거]]에서 기어코 전국 22개 지역 단체장 가운데 과반인 15개, 특히 직할시급의 6개 주요 단체장 가운데 절반인 3곳(타이중, 가오슝, 신베이)에서 당선자를 내는 승리를 거두었다. 오래간만의 대승에 당이 고무되었고, 2020년 차기 총통선거도 기대를 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사진이|그러나]] 2019년, 뜻밖의 재보선 패배[* 타이페이 2선거구를 포함한 5석이 걸린 재보선에서 민진당에게 2대3으로 패배했다.]에 이어 다시 한번 [[홍콩 범죄인 인도법 반대 시위]]가 대규모로 일어나면서, 유력해보였던 정권 탈환의 분위기에 찬물이 끼얹어졌다. [[양안관계]]에서 현재 여당인 민진당에 비해 친중 이미지가 강한 상황에서 중국의 [[일국양제]] 무력화 시도와 시민들의 저항, 뒤이은 홍콩 행정부의 추태를 대만인들이 직접 보게 되면서 보다 반중 정서가 강해졌기 때문. 실제 이 때문인지 지난 지방선거의 주역으로 평가받은 유력 대권주자 [[한궈위]] 가오슝 시장도 직접 [[일국양제]] 수용을 부정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장제스]]의 '''증손자'''이자 [[제9대 대만 입법위원 선거]]에서 [[타이베이]] 선거구에서 당선된 [[국회의원]] [[장완안]](蔣萬安, 장만안)이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을 위해 뛰쳐나온 홍콩 시위대를 지지하며 [[일국양제]]를 거부하는 논평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렸다. >[[파일:r23rt23frewqfwef.png]] >香港的學生及年輕人,無懼港警強力鎮壓,為了捍衛自由與民主,向全世界發聲及吶喊,對於這樣的勇敢,我必須要給予最高的敬意 >홍콩의 학생 및 청년들 여러분, 홍콩 경찰의 강경 진압에 두려워 말고, 자유와 민주를 지켜내기 위해, 전 세계에 목소리와 외침을 내십시오. 이러한 용감함에, 저는 반드시 최고의 경의를 표합니다. > >在臺灣,一國兩制沒有存在的空間,民主自由憲政體制也不容任何破壞及妥協。政府除了要密切注意並維護在香港就讀的臺生、在港工作的臺灣民眾人身安全,必要時也該提供香港民眾人道救援。 >대만에서도 일국양제는 존재할 여지가 없고, 민주자유 헌정체제도 파괴 및 타협할 수 없습니다. 정부는 홍콩에 재학 중인 대만 학생, 홍콩에서 일하는 대만 민중의 신변 안전을 주의하고 지키는 것 외에, 필요하다면 홍콩 민중의 인도적인 구원을 제공할 필요가 있습니다. > - [[장완안]](蔣萬安, 장만안) [[입법원|중화민국 입법원]] [[국회의원]](중국 국민당) [[https://www.facebook.com/chiangwanan/posts/2571988129561350|출처]] 장개석의 자손이라는 점 때문에 양쪽에서 나름 시끌벅적했는데, [[중국]]에서 몰려온 [[우마오당]]들은 해당 글의 댓글에 '''"장개석 얼굴에 먹칠할 거면 [[민주진보당]]으로 꺼져라"''' 등 각종 [[패드립]]을 치고 있고, [[범록연맹]] 지지자들도 '''"진정성이 전혀 없다"'''며 비난하고 있다.[* 사실 국민당의 친중공적 인상은 차치하고서라도, 바로 장제스가 장완안이 말하는 민주자유 헌정체제를 대만에서 억압한 주범이었는데 그 증손자는 정작 다른 입장을 보이니 안티 입장에서 꼬투리를 잡는 것이다. 그러나 자손이라고 해서 조상과 정치입장이 같으라는 법은 없으므로 엄밀히 보면 [[억까]]로 보는 것이 맞다.] [[시진핑]]을 지지하는 우마오당과 [[타이완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범록연맹]]이 하나되는 희한한 장면이 연출된 셈. [[https://www.facebook.com/chiangwanan/posts/2571988129561350|링크]]. 제15대 대선을 앞두고 12월 14일에 국민당 사무실 폭파 기도가 나왔다. [[https://www.yna.co.kr/view/AKR20191217090200089?input=1195m|링크]]. 2020년 1월 11일, [[제15대 대만 정부총통 선거]]에서 국민당 후보로 출마한 [[한궈위]] 후보가 38.6%의 득표율로 낙선하였다.[* 심지어 2020년 6월엔 현직이던 [[가오슝]] 시장 자리마저 아예 주민소환으로 파면당하면서 정치적으로 몰락할 위기에 처했다.] 동시에 진행된 [[제10대 대만 입법위원 선거]]도 38석에 그치는 패배를 당하며 다시 4년간 소수 야당 생활을 이어가게 되었다. 게다가 홍콩 경찰을 지지한다고 한 예위란(葉毓蘭)과 중국에 건너가 [[시진핑]]의 훈화를 듣고 온 퇴역 장성 출신 우쓰화이(吳斯懷)를 기어이 비례대표 1번과 4번에 부여해서 당선시켰다. 이로써 친중 정당이라는 이미지가 선명하게 박혔다. 다만 한편으론 이런 연이은 대선, 총선 참패 때문인지 [[92공식]], [[하나의 중국]]을 언급하지 말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당내에서도 커지고 있다. 이대로라면 당이 소멸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도 나왔다.[[https://n.news.naver.com/article/001/0011333287|#]] 실제로 대만은 젊은 층일수록 자신이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이 사라져 가고 있는데[* 모 여론조사에서 고교생 중 자신이 오로지 대만인이라고 생각하는 비율은 79%에 달하고, 중국인과 대만인 양자 모두에 해당한다는 비율은 20%였다. 자신이 완전히 중국인이라고 생각하는 고교생은 1%도 되지 않았다.] 현재 국민당의 주 지지층은 50세 이상의 고령층이고 이들은 장제스·장징궈 시절을 그리워하는 경우가 많다. 허나 현재 40대 이하의 대만인들은 이런 기억이 없기 때문에 이들이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국민당을 지지할 가능성도 희박하다. 즉, 중국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전략은 시간이 지날수록 국민당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다. 이러다보니 중국 국민당의 "중국"을 당명에서 삭제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법 나오는 판국이다. 더군다나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패권주의로 인해 반중정서가 매우 커진 상황이라 이번 선거 참패를 계기로 대륙에 대한 관계를 어떻게 재설정하느냐가 향후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이러한 여론이 국민당 내에서도 반영되었는지 2020년 3월 취임한 장치천 주석은 민진당의 차이잉원 총통이 [[홍콩 민주화 운동]]에 대한 지지표명을 재차 하자, "차이 총통은 말로만 홍콩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지 말고 행동으로도 지지하라"며 더 급진적인(?) 주장을 하기도 했다. 또 국민당 당내 개혁위원회는 지난 몇 달 간의 논의를 거쳐 마련한 건의안에 [[92공식]] 거리두기를 언급하기도 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8/0002502027?sid=104|#]] 다만 당내에서는 여전히 중공과의 설정 문제에 이견들이 많아 통일된 담론이 나올 수 있을지는 의문스러운 상황. 2020년 9월 6일 열린 전국대표자회의에서는 일단 [[92공식]] 당론 유지가 결정됐다. 8월 15일에 열린 가오슝 시장 재보궐선거에서 25%만 득표하는 참패를 겪었다. 결국 가오슝은 다시 민진당의 텃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9윌 20일에 중국 푸젠성 샤먼에서 열리는 제12회 해협논단에 [[왕진핑]] 전 입법원장(국회의장)을 단장으로 한 대표단 파견을 취소했다.[[https://n.news.naver.com/article/001/0011883066?sid=104|#]] 2021년 2월에 들어 인터넷 상의 정치적 영향력이 민진당을 추월하여 대만 전체 정당 중 1위를 기록하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Svb4yksh-Ao|#]] 이러한 경향에 대해선 가오슝 시장 파면 이후 정치적 생명이 끝난 줄로만 알았던 [[한궈위]] 전 시장의 정치 재개를 예고하는 각종 활동들과[* 다만 한궈위는 파면 이후 4년 동안 해당 직에 다시 도전 할 수 없다는 대만 법에 따라 2024년까지 가오슝 시장 선거에 나올 수 없다. 만약 정계 복귀를 한다면 차기 입법위원 선거를 노릴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더불어 장치천 현 주석의 주석 연임 선언, 정계 은퇴 후 각종 방송에서 정치 평론을 하던 유명 방송인 자오샤오캉(趙少康)의 국민당 차기 주석 선거 출마 선언과 이후의 정치적 행보 등 여러 요인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한궈위]] 같은 경우는 이미 대선 후보를 한 경험이 있고, 그의 행보를 통해 그의 강력 지지층들인 한분(韓紛)의 영향력이 여전히 막강하다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어 사실상 고사 직전의 국민당 내 분위기를 올리는 데 크게 일조하였다. 자오샤오캉 역시도 그가 진행하는 정치 프로그램을 다루는 유튜브 채널의 구독자가 100만 명이 넘고, 차기 유력 대선 후보로까지 거론되는 만큼 국민당 내의 성량을 올리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국민당 내에선 이러한 경향이 차기 대선까지 이어지길 바라지만, 실제 선거와 SNS 내의 경향이 꼭 일치한다고 볼 수 없고[* 이는 인터넷상의 지지가 실제로는 '''극성 지지층'''에 의한 [[찻잔 속의 태풍]]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커서인데, [[대한민국]]에서도 [[팟캐스트]] 정치를 통한 네거티브 전략이 [[나는 꼼수다|실패한]]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와 [[유튜브]]를 통한 가짜뉴스, 극우 프로파간다 확산이 [[우파 유튜버/비판 및 논란|실패한]]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이미 입증된 바 있다. 미디어를 통한 선거 전략에서 이기려면 국민당도 이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상황.], 올해는 대규모의 선거가 예정되어 있지 않은 만큼 국민당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이러한 기조를 오래 끌어와야 한다는 부담을 안게 되었다. 한편 근래 들어(2021년 6월부터) 국민당 소속 입법위원 중에서도 정리원(鄭麗文; Cheng Li-Wen)[* 정치토크쇼 중에서는 가장 유명한 [[TVBS]]의 샤오캉 상황실에서 패널로 자주 등장하며, 그 외에도 여러 정치 관련 프로그램에서 패널로 많이 등장한다. 원래는 민진당 소속으로, 그것도 온건파가 아닌 급진 [[대독]]파로 정계입문을 하였으나 이후 모종의 사건으로 민진당에서 제명되어 국민당으로 당적을 바꾼 케이스다.] 위원이 민진당 비판에 선봉장으로 나서고 있는데, 주로 한국과 대만의 실태를 비교하며 현재 차이잉원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자신의 페이스북 및 유튜브 채널에 많이 올린다. 7월 12일에는 "작년에는 한국 누리꾼들이 대만이 방역모범국이라고 말했는데, '''한국인들이여, 올해도 작년처럼 생각하십니까?'''"라고 말하며 현재 대만은 한국보다 방역 및 백신 확보/접종 면에서 더 못하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국민당은 과거 [[혐한]]성 광고를 내보낸 바 있다. 2021년 9월 25일 국민당 주석 선출을 앞두고 중국에 더욱 유화적인 스탠스를 취하는 장야중 후보가 세를 불리고 있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25/0003136905|#]] 9월 25일 [[2021년 중국 국민당 주석 선거|주석 선거]]에서 전 주석이자 2016년 총통 선거 국민당 후보였던 [[주리룬]]이 당선, 10월 30일 취임할 예정이다. [[https://news.v.daum.net/v/20210925234454851|#]] [[2021년 대만 국민투표]]에서 중국국민당이 찬성을 내건 4개 안건이 전부 '''부결'''이 뜨며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심지어 [[허우여우이]]의 경우 제4원전이 지역구 내에 있어서 국민당의 움직임에 협력하지 않았다. 차이잉원 정권의 코로나 확산으로 인한 지지율 하락에 의한 반사이익과 천보웨이 파면 성공으로 기세등등했던 2021년과는 달리 2022년 들어 중국의 위협과 뚜렷한 구심점 부족으로 지지율이 정체를 면치 못하고 있다. 심지어는 [[커원저]]의 대만 민중당보다도 지지율이 낮다는 여론조사가 나올 정도다. 그러나 2022년 11월 26일의 지방선거에서 승리하며 다시 재부흥의 기회를 열었다. 20개의 지자체장 중 13개를 가져가며 남부 가오슝 등의 텃밭 5개만 겨우 사수한 민진당을 다시 따돌렸다. 수도 타이페이 시장에는 국민당 후보로 나선 장제스의 증손자 [[장완안]]이 당선되었다. 그리고 4년 만에 지지율도 민진당을 앞서게 되었다.[[https://m.yna.co.kr/view/AKR20221216114300083?section=international/all|#]]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