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국/경제 (문단 편집) === 중국의 경제 발전 과정 ===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공산당]]이 승리하고 [[중국국민당]]이 [[타이완 섬]]으로 도피한 1949년, [[마오쩌둥]]의 공산 정책의 불길을 우려한 중국 자본가들이 중국 국민당과 함께 타이완으로 달아나고 이와 함께 국가경제 또한 상당량 타이완으로 빠져나갔다. 그렇지만 신중국이 개국된 1950년대에는 전쟁이 끝나고 일단은 평화가 찾아온 영향[* 물론 마냥 평화롭지는 않았고 지주를 열심히 족치기는 했다.]도 있고, 타이완으로 떠나지 않고 남은 자본가에게도 공산당을 후원해주면 계속 기업을 운영하도록 해주겠다고 어느 정도 유화책을 쓰면서[* 일단 소유권은 철폐되었지만 소유권이 철폐되었다고 해서 쫓아내는 것은 아니었고 해당 기업을 국영기업으로 바꾸는 대신에 경영자나 책임자로 지속적으로 고용되는 방식을 썼다. 비록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닥치면서 상당수의 자본가들이 [[홍위병]]들에게 [[조리돌림]]을 당하는 시련을 겪으면서 몇년간 흔들리는가 싶었지만 개혁개방 정책이 시행되었을 때 이들 계층이 가장 먼저 수혜를 입었다.] 일정 수준의 경제 성장이 이루어졌고 아시아 1위 경제대국이 되었지만 마오쩌둥이 여기에만 만족하지 않고 [[흐루쇼프]]의 소련에 맞서서 여기서 더욱 빠르게 경제 성장을 하겠다면서 [[대약진 운동]]을 추진하다가 되려 일이 제대로 꼬이는 바람에 4,000만 명 이상이 기근으로 굶어죽는 대참사가 벌어졌고, 산업 전반의 생산성은 오히려 떨어지는 일이 발생했으며 그 영향으로 1960년에는 사상 초유의 '''-25%''' GDP 성장률을 찍으며 [[일본]]에 따라잡혔다. 중국과 위에서 언급한 [[한국]]과 [[파키스탄]]의 1인당 GDP가 역전된 시기 또한 1960년이며, 이후 중국은 파키스탄의 1인당 GDP는 1990년 무렵 따라잡지만 2020년 현재까지 한국의 1인당 GDP를 따라잡지 못하게 된다. 1960년대 초중반에는 [[류사오치]]가 지도자로 등극하면서 대약진 운동의 후유증을 수습하며 그제서야 중국 경제는 다시 정상을 되찾는듯 싶었지만 1966년 [[문화대혁명]]으로 다시 한번 온 대륙이 쑥대밭이 되며 중국은 경제성장의 기회를 놓치게 되었고, 이 기간 동안 [[서독]], [[이탈리아]], [[캐나다]] 등에게 경제규모를 따라잡혀가며 경제력 순위는 나날이 하락해나가기만 했다. [[문화대혁명]]이 한창 진행중이던 1972년 데탕트 전략에 따라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중국에 방문한다. [[월스트리트]]의 전설적인 투자자이자 중국 투자의 귀재로 잘 알려진 [[짐 로저스]]는 당시를 회상하며 "대부분의 미국인들처럼 이 새로운 변화를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지만 훗날 이 결정으로 인해 세상이 바뀌었다"고 언급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LlurrUe3oP4)]}}}|| 중국을 10여년간 난장판으로 만든 [[문화대혁명]]은 1976년 [[마오쩌둥]] 사망과 [[사인방]]의 축출로 끝났다. 이후 [[화궈펑]]과 [[덩샤오핑]]의 권력투쟁이 있었고 마오쩌둥이 점지한 후계자인 화궈펑이 1981년 축출되면서 덩샤오핑의 승리로 돌아갔다. 문화대혁명 직후에 중국 경제는 한없는 나락으로 떨어졌고 경제규모 또한 1950년대 말의 5위에서 10위권 밖으로 밀려났으며[* 최저점은 1981년도의 13위. 당시 인구 4천만도 안되었던 [[스페인]]보다도 경제규모가 뒤떨어져있었다.] 당시 농촌은 지금의 북한처럼 [[식량난]]에 허덕이고 있었으며 1인당 국민소득 또한 200달러 아래로 세계 최하위권을 달리고 있었으며[* 당시 중국에서 쌀이나 밀가루는 동네단위로 배급했고, 이유를 대야 추가배급이 가능했으며 고기는 일주일에 한번씩은 배급했다. 이외에도 여러 생필품의 경우에는 배급표가 있어야 살 수 있었던 경우도 많았다. 사실 그때도 외식할 사람은 외식했지만 저축하느라고 외식을 매일같이 했다거나 하는 것은 별로 없었던 시절로 [[베이징 카오야]]를 1번 먹을려고 1년 동안 돈을 모아서 1번씩 먹었던 시절이었다.] 1인당 국민소득으로 따지면 북한이 중국의 최소 4~5배 이상은 되었을만큼 중국보다 훨씬 잘 살았다. 뿐만 아니라 문혁 당시 자급경제를 이룩하겠다고 실시한 여러 산업시설이나 농업정책들은 오히려 경제적인 짐이 되어 총체적으로 문제가 많았다. 덩샤오핑은 먼저 인민공사를 해체하고, 농민에게 토지를 불하하는 개혁을 실시했는데, 이는 많은 반발이 있었지만 식량생산을 급격히 늘려 1949년 건국 이후 30여년간 중국을 괴롭혔던 식량부족 사태는 더이상 없어지게 된다. 사실 식량부족 사태는 청나라 말기 이후 중국의 고질적 만성문제였으며, [[장제스]] 치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즉 덩샤오핑은 이렇게 백여년간 내려오던 문제를 단숨에 해결한 것이다.[* 다만 청나라 후기에는 화학비료가 [[프리츠 하버|아직 대두되지 않았으며]], 장제스 치하 국민당 시절에는 [[중일전쟁|전쟁]] 중이었고, 공산당 집권 초기는 [[집단농장]]과 [[대약진 운동]]이 생산성을 다 말아 먹었기 때문에 덩샤오핑이 무슨 대단한 수를 써서 생산성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다.] 이후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을 선언하며 여러가지 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먼저 [[홍콩]] 옆의 자그마한 어촌마을이었던 [[선전(도시)|선전]]을 개혁특구로 지정하여 이곳에 서구의 [[자본]]과 [[기술]]을 끌어들였다. 이후 이곳의 성과가 눈부시자, 특구를 4개로 확대하였고, 계속 확대하였다. 이 당시만 해도 [[냉전]]이 끝나기 전이었고, [[미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소련과 다른 노선의 중국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이렇게 개혁개방이 진행되는 와중에 인적자원 문제는 전혀 없었다고 봐도 무방한데, 마오쩌둥 시절에도 기업을 경영하던 민족자본가들이 수백만 명 정도에 달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문화대혁명때 광풍이 불면서 상당수가 [[홍위병]]들에게 조리돌림당해서 한직으로 쫓겨났지만 문혁 바람이 잠잠해지자, 이들의 상당수가 다시 복귀하면서 기업을 차렸고, 쌓인 경험은 어디 안간지라 아예 결국 이들이 개혁개방 과정에서 가장 먼저 수혜자가 되었다.] 1980년대 중국 산업은 이렇게 개방된 해안지방의 특구에서 경공업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이는 소위 [[아시아의 네 마리 용]](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과 비슷한 경로의 발전이었으며, 이때부터 중국은 세계의 공장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부터 물가상승률이 급속히 상승하면서 개혁개방 정책의 부작용이 일었고 [[천안문 6.4 항쟁|천안문 사태]] [* 문화대혁명이 떠오른다는 이유로 처참하게 진압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미묘하게 다르다는 걸 알았더라도 진압은 멈추지 않았을거 같지만...]때문에 잠시 개혁개방이 주춤하기는 하지만, 1990년대 다시 불붙었고, 이때부터 중국의 개혁개방의 성과는 점점 내륙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경공업]]으로 시작한 발전이 확산되자, 중국은 [[중공업]]과 하이테크 산업에 눈을 돌렸다. 이런 하이테크 산업을 육성할 때, [[중국 정부]]는 거대한 시장을 이용하여 외국기업의 기술과 자본을 유치하였다. 이런 방법은 [[자동차]]에서 두드러졌으며, 처음에 만들어진 중국 자동차회사들은 대부분 합작사였으나, 이런 기술 [[낙수효과]]로 2000년대 들어 중국 고유모델들도 나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런 자동차나 전자제품과 같이 기술집약적 제품들은 처음에는 기술적 소화가 미흡하여 여러가지 문제점을 보였으나, 점점 시간이 갈수록 개선되는 추세이다. 일례로 한일 서브컬처 웹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끈 2000년 제품 [[선행자]]가 있는데, 로봇의 모양새는 굉장히 조잡하지만, 알맹이를 보면 이때부터 이미 기술력 개선의 과도기적인 경향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그 결과 2010년 중국은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2010년 중국 : 5조 8천 790, 일본 : 5조 4천 740] 2020년에 이르러서는 일본의 3배에 달하게 되었다. 현재 중국의 경제 규모는 [[미국]]의 72% 정도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