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준요(항공모함) (문단 편집) == 함생 == 1939년 3월 20일 카시와라 마루라고 이름붙여져서 건조가 시작되었다. [[미쓰비시 중공업]]의 나가사키 조선소에 2번 선대에서 건조가 시작되었는데 바로 옆에는 건조가 더 빨랐던 [[야마토급 전함]] 2번함 무사시가 건조중이었다고... 1941년 2월에 해군에 함선이 인수되고 6월 진수되었다. [[미드웨이 해전]] 직전인 1942년 5월 3일 취역했다. 보통 준요는 [[히요]]급 2번함으로 불리지만 본함선의 건조시작은 준요쪽이 더 빨랐다. 준요의 경우에는 1939년 3월 20일에 건조가 시작되었고 히요는 동년 11월 30일에 건조가 시작되었다. 취역도 준요가 더 빨랐는데 진수가 히요쪽이 이틀 더 빨라서인지 히요급으로 불린다. 준요는 완성된 후 [[류조]]와 함께 가쿠타 가쿠지 제독의 제4항공전대에 배속되어 [[알류샨 열도]]를 공격했다. 작전은 성공리에 마무리되었으나 동시기에 진행된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은 역사에 남을 참패를 당해 항공모함 4척을 잃었다. 이후 준요는 [[일본군]] 항공함대를 재건하기 위한 개조항공모함으로 이루어진 기동부대의 일원으로 제2항공전대 기함이 되어 과달카날에 투입되어 전투에 참가했다.[* 2항공전대에 소속된 항공모함은 [[류조]]와 [[히요]]가 있지만, 류조는 동부 솔로몬 해전에서 미끼로 쓰여 격침되었고 히요는 기관고장 때문에 과달카날에 투입될 수 없었다.] 그리고 [[산타크루즈 해전]]에 [[쇼카쿠]], [[즈이카쿠]], [[즈이호]]와 함께 참전하는데, 여기서 쇼카쿠는 대파당하고 즈이호는 [[엔터프라이즈]]의 함재기 2기의 폭격으로 중파당하지만 준요는 즈이카쿠와 협력해서 [[엔터프라이즈]]를 중파시켜 후퇴하게 만들었고, 후퇴하던 [[호넷(항공모함)|호넷]]을 연속 공격, 미군이 [[버틸 수가 없다!]]를 외치며 호넷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이후 일본군은 호넷을 나포하려 했으나 위험하다고 판단, 나포를 포기하고 어뢰로 침몰시켰다. 그러나 준요 역시 함재기를 많이 잃었고, 항공대를 잃은 즈이카쿠가 중파된 즈이호와 대파된 쇼카쿠와 함께 일본으로 후퇴함으로서 과달카날에 혼자 남겨졌다. 그 후 [[과달카날 해전]](일본명 제3차 솔로몬 해전)에도 참전했으나, 함재기 부족으로 큰 전과를 올릴 수 없었고 일본군은 패배했다. 이후에는 수송임무나 과달카날 철수작전 등에 참가했으며, [[필리핀 해 해전]]에서 미군의 공격으로 지근탄 6발, 명중탄 2발을 맞아 중파되었다.[* 이때 종을 잃어버렸는데, 이 종은 미군이 회수했다. 자매함 히요는 이 해전에서 격침되었다.] 이후 제2항공전대가 해산되면서 준요는 마츠다 치아키 소장이 지휘하는 제4항공전대에 들어가지만 준요에 탑재할 함재기들이 다른 임무로 전용되는 바람에 빈 깡통이 되어버렸다. 결국 제4항공전대는 이세와 휴가 2척의 [[항공전함]]만 가지고 [[레이테 만 해전]]에 참전해야 했고, 준요는 불참했다. 그 후에는 함재기가 없어 수송임무에만 주력했다가 1944년 12월 9일 미군 잠수함 3척의 어뢰 공격을 받고 대파당해 사세보 항으로 돌아간 뒤 수리를 받았다. [[야마토급 전함]] 1번함 야마토와 함께 오키나와로 출격시킬 계획도 있었지만, 우현 엔진 수리가 끝나지 않아 운좋게도 출격하지 않았다. 이후 나무로 위장하고 은닉, 한 번도 공습을 당하지 않고 그 상태에서 종전을 맞았다. 그 후 1947년에 해체되었다. 준요가 치룬 마지막 실전은 필리핀 해 해전이었고, 이후로도 수리가 늦어져 오랫동안 출전하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