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죽염 (문단 편집) == 역사 == 인산 김일훈의 후손 및 관련자들은 죽염의 기원을 인산 김일훈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인산식 죽염에 한정된다. 왜냐하면 죽염은 1765년에 나온 본초강목습유에도 [[https://mediclassics.kr/books/203/volume/2#content_349|제조 방법이 기록]]되어 있고, 실제로 서기 634년(백제 무왕 35년)에 창건된 1300년 고찰인 [[전라북도]] [[부안군]] 소재 개암사의 주지들에게 대대로 비전되어 왔다는 증거[* 이 또한 구전이 아닌 문헌상의 증거라든가 물증과 같은 사료가 있어야 의미가 있다. 비단 죽염뿐 아니라 전통 관련한 단체에서 수백 년 혹은 천 년 이상 대대로 전승 혹은 구전되었다는 주장은 매우 흔하지만 객관적으로 검증된 경우는 매우 드물다.]도 있기 때문이다. 개암사 전 주지 효산(속명 허재근)은 비전된 죽염 제법을 수집 및 정리하여 전통 죽염 제법으로 안정시킨 장본인이며, 이런 역사와 공로를 인정하여 전라북도에서는 1999년에 이르러 효산에게 무형문화재 제 23호 '죽염제조장'을 수여했고, 효산(허재근)의 뒤를 이어 2005년에 김인석에게 전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고 하는 사실이 곧 죽염의 역사성이나 정통성을 방증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현행 '무형문화재 보전 및 진흥에 관한 법률'과 동법 시행령 및 시행규칙에서는 무형문화재 지정 요건으로써 '구술'에 의한 기능도 인정하고 있으며, 이것은 역사적 고증이 없이도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로 지정할 수 있다는 의미다. 현재까지 죽염의 기원과 관련하여 인산 김일훈이 제시한 내용 이외의 역사적 증거는 없고, 모두 '설화'일 뿐이다.] 현대 통용되는 죽염의 제조법과 대중화는 인산(仁山) 김일훈(金一勳 1909~1992)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현재 죽염이라는 이름으로 시중에서 시판되고 있는 것들 대부분이 약소금이다. 이런 탓인지 시판되는 상당수 죽염은 'X회 죽염' 이라는 식으로 몇 번 구웠다고 알리는 경우가 많은데, 구운 횟수에 비례하여 가격이 급상승하며 9회 죽염쯤 되면 100 g에 2만 원이 넘는다. 인산 김일훈의 책 <신약>에 의하면 우리 조상들이 아주 옛날부터 [[대나무]]에 소금을 넣고 구워 소화제 등 민속약으로 쓰던 죽염을 그 방식을 개량(수천도의 열로 아홉 번 구워 기화, 용융시킨다)하여 약효를 배가시켰다고 한다(신약 p34). 김일훈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죽염을 보급하는데 힘을 썼다고 하는데 제조법이 일반에 공개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이라고 한다. 1971년 11월호부터 72년 7월호까지 연재한 <대한화보>에 최초로 제조법이 공개되었다. 그 후, 1980년에 <우주와 신약>(광제원)에 공개되면서 조금씩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1981년에 풀어쓴 <구세신방>(광제원)과 1986년에 한글판 <신약>(인산가)에 기재되어 보급되어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후 본격적으로 죽염을 산업화하여 1987년 경남 함양군에 최초의 죽염 공장을 설립, 생산, 시판하여 현재에 이른다. 이후 1989년 이후로 전국에서 각종 죽염 제조법이 고안되어, 수십 건이 넘게 특허출원되었고 죽염 응용 제품이 생산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