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주페이더 (문단 편집) === [[국민혁명]] === 북벌 초기 [[우페이푸]]의 양호 지역을 먼저 공격한다는 전략에 따라 2군과 함께 우익군에 배치되어 호남과 호북을 공격했다. 이후 [[영왕운동]]에 동조하여 강서성 공격 과정에서 큰 손실을 입은 장제스가 지원을 요청했을 때 왕징웨이와 친분이 전혀 없음에도 장제스에게 먼저 왕징웨이 복직을 지지하라고 요구하여 장제스를 크게 놀라게 했다. 1927년 1월 [[난창 군무선후회의]]에 참석했다. 우한 점령 이후 8군 군장 [[탕성즈]]가 휘하의 [[허젠]] 등을 군장으로 승진하여 3개 군을 통솔하고 양호 지역을 장악하는 것을 경계하였고 이 때문에 장제스가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지만 군비 문제 때문에 장제스와 감정이 좋지 않았는데다가 장제스가 난창 천도론을 주장하며 난창을 기반으로 삼으려하자 자신의 기반을 잃을 것을 경계하여 반장 감정을 품게 되었고 1927년 4월 1일, 장제스를 경계하려는 우한 국민정부의 의도에 따라 강서성 정부주석에 임명되면서 완전히 반장파에 가담했다. 1927년 3월에 열린 3중전회에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참석하진 않았다. [[탕성즈]]의 8군, [[천밍수]]의 11군, [[장파쿠이]]의 4군과 함께 난징, 상하이 공략에 참가했고 [[4.12 상하이 쿠데타]] 중에 장제스로부터 지지를 호소받았으나 따르지 않고 [[왕징웨이]]의 우한 국민정부에 잔류했다. 허나 5월에 [[양썬]] 등이 분공을 촉구하며 우한 국민정부에 대항한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관망하다가 분공조치에 동참하여 5월 29일, 강서성에서 공산당원들과 국민당 좌파를 추방하고 난창에 계엄령을 선포하여 노농운동을 탄압했다. 1927년 6월, [[탕성즈]]가 장제스 타도를 선언하자 휘하의 3군을 거느리고 [[장파쿠이]], [[허젠]], [[차이팅카이]]와 함께 장제스를 토벌하기 위한 동정에 나섰으나 8월 1일 [[난창 폭동]]이 발생하면서 큰 손해를 입고 [[허젠]]에게 선봉을 내주고 동정에서 사실상 이탈해야 했다. 1927년 9월 [[영한합작]]이 성립된 이후 강서성에서 국민당 특별위원회에 복종했으며 탕성즈가 우한 정치분회를 조직하여 특별위원회에 도전하다가 안휘성을 무력으로 점령하는 등 도발을 감행하자 10월 20일 발표된 탕성즈 토벌작전에 동참하여 [[청첸]], [[리쭝런]], [[바이충시]], [[펑위샹]], [[리지선]]과 함께 [[당계전쟁]]에 참여하여 탕성즈를 무력으로 토벌하였다. 탕성즈는 11월에 하야하여 일본으로 망명했고 양호 지역의 탕성즈 정권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이때부터 주페이더는 반장세력에서 이탈하여 장제스에게 복종하였다.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이 시작될 때 1집단군 전적 총지휘관에 임명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