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주체사상 (문단 편집) === [[일본제국|일제]]의 군국주의 [[천황]]제 사상의 영향 === > 분단 과정의 북한 사정에 관해 좀 더 부연하겠습니다. 그와 관련하여 《재인식》에 실린 키무라 미츠히코(大村光彦) 교수의 <파시즘에서 공산주의로ㅡ북한 집산주의 경제정책의 연속성과 발전>과 신형기 교수의 <신인간ㅡ해방 직후 북한 문학이 그려낸 동원의 형상>이 정말 좋은 논문들입니다. > > '''키무라 교수의 논문은 북한의 경제체제가 일제의 전시경제체제를 그대로 계승한 것임을 설득력 있게 논증하고 있습니다.''' 앞서 소개하였습니다만, '''일제는 전쟁수행을 위해 시장경제를 정지시키고 공출과 배급으로 상징되는 전시경제체제를 구축합니다. 이 통제경제는 해방 후 남한에서는 곧바로 폐지되어 시장경제가 부활하지만, 북한에서는 이름만 바꾼채 더 강화된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예컨대 공출(供出)이라는 강제수매제는 성출(誠出)로 이름이 바뀝니다만, 내용을 보면 값도 치르지 않고 거두어 가는 경우가 많고 쌀 이외의 다른 작물에까지 그 대상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일제가 시행한 마을단위의 생산책 임제는 증산돌격대로 이름이 바뀌지요. 공업에서도 유사한 상황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해방 후 북한의 이 같은 실상을 명확히 하면서 키무라 교수는 과연 북한 민중에게 ‘해방’이란 것이 있기나 했던가 라고 묻고 있습니다. 너무 당돌한 질문이라 처음에는 좀 어리벙벙했습니다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의 질문이 촌철살인(寸鐵殺人)입니다. 그렇지요. 민중의 일상적 경제생활에 대놓고 물어봅시다. 공출이나 성출이나 그게 그것이지요. > > 다음은 신형기 교수의 논문입니다. 사회주의적 동원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 일반 민중에게 ‘신인간’이란 이상적인 인간상이 제시되었습니다. 지주, 친일파, 이기주의, 개인주의, 이런 것들은 낡은 ‘구인간’의 상징이었습니다.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은 철저히 일반 민중으로부터 구획되고 배제되었습니다. 그리고선 사회주의혁명이 요구하는 고된 노동을 감당할 만한 정신적 긴장의 새로운 인간상이 제시되었습니다. ‘신인간’의 상징은 항일 무장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끈 영웅, 개선장군 김일성이었습니다. '''결국 [[일본 제국|일제]]의 [[천황]]을 대신한 것은 다름 아닌 [[김일성]]이었습니다.''' 이 논문을 읽고 나서 김일성종합대학이 세워지는 것을 확인하니 1946년 7월이군요. 대략 그 즈음부터 대량의 ‘구인간’들이 남으로 향하기 시작합니다. 전쟁 전에 이미 100만의 행렬이었습니다. 북한 주민의 1/10이나 되는 큰 인구였습니다. 그보다 더 분단의 과정과 그 역사적 의의를 웅변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달리 어디에 있겠습니까. >---- > - 【 대한민국 이야기 】 [[이영훈]] ([11] 분단의 원인과 책임 [11]-5 천황제를 계승한 수령체제) [[http://yeoksa.blog.fc2.com/blog-entry-197.html|출처]] [[https://www.dailynk.com/%EB%B6%81%ED%95%9C%EC%9D%80-%EC%9D%BC%EC%A0%9C-%EC%A0%84%EC%8B%9C%EA%B2%BD%EC%A0%9C%EC%B2%B4%EC%A0%9C-%EA%B7%B8%EB%8C%80%EB%A1%9C-%EA%B3%84/|“북한은 일제 전시경제체제 그대로 계승했다”]] 과거 [[일본 제국]]은 [[일제강점기|한반도를 35년동안 지배했던]] 나라이기 때문에 김일성 김정일 부자는 해방이 되자 친일파 숙청과 일제 잔재 청산을 철저히 했다고 주장해 왔다. 북한은 이와 함께 김일성과 김정일 가계를 항일 투쟁의 영웅으로 떠받들고 있다. 하지만 '''여러 연구 자료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북한]]의 주체사상(전체주의와 수령제)은 [[일본 제국]]의 군국주의, 천황제와 매우 유사한 성격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전문가들의 증언과 각종 연구 자료들로도 명확히 입증되는 부분이다. 실제로 [[북한]]의 권력층은 [[광복]] 직후 [[일본]]의 [[천황|천황제]]를 깊이있게 연구했다고 한다. 북한은 인민민주주의 공화국을 표면적으로 내세웠지만 건국 전부터 천황제에 관심이 많았다고 하며, [[김일성]]의 개인 [[신격화]]는 [[일본]] [[천황]]제와 유사해 부자 [[세습]]이 가능하도록 북한의 국가체제도 만들어 김씨 일가의 세습이 유지된다는 설명이 존재할 정도이다. [[https://www.hankyung.com/thepen/lifeist/article/202103228757Q|북한과 일본의 공통점 알고 보니, 천황제와 수령제]] 실제로 미국 코네티컷 대학교의 김일평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김일성, 김정일 부자가 최고의 지도자로 군림하고 주민들에게 김부자에 대한 충성과 희생을 강요하는 북한의 주체사상은 오직 천황의 권위 아래 모든 국민이 복종해야 했던 일본의 천황숭배와 제국주의 사상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처럼 북한과 일제의 유사성으로는 먼저 '천황(天皇)'과 '수령(首領)'이라는 신격화된 인간의 존재라는 매우 큰 공통점이 있다. 이 두 존재는 '''[[국가신토]]'''(國家神道)와 주체사상이라는 [[종교]]적 기반 위에 일사불란한 명령·동원 체제라는 현실정치의 물적 기반이 강고히 결합된 전체주의 체제의 수장이다. 따라서 정교(政敎) 분리가 이루어지던 봉건시대 군주의 지위와 권능을 훨씬 능가하는 절대적 존재다. '''국가를 이끌기 위해 그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 국가가 존재한다.''' 인민은 그들에게 무조건적 충성을 바쳐야 한다. 유사한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대(代)를 이어 충성하는 세습제도 역시 동일하다. 군을 핵심기반으로 한 통치 스타일도 일치한다. 천황은 육·해군의 대원수였다. 김정일은 국방위원장이자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이다. '''천황제에 [[군국주의]]가 있었다면, 수령제에는 [[선군정치|선군(先軍)정치]]가 있다.''' 세계 평화를 위협한다는 점도 일치한다. 공화국이 아니라는 점에서 두 체제 모두 근대시민과 국민이 없다. 수령님께 충성스러운 조선인민은 천황폐하께 충성스러운 황국신민과 차이가 없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5/10/16/2005101670301.html|[아침논단] 북한 수령제는 일본 천황제의 모방품이다]] 실제로도 오늘의 북은 1945년 패전을 앞둔 [[일본]]의 처지, 정신구조와 놀라울 정도로 빼닮았다. 일제의 천황제와 군국주의가 북의 수령제와 주체사상을 낳았다는 의견이 [[보수]][[신문]]에서도 공공연히 나올 정도이다. [[https://www.donga.com/news/Politics/article/all/20050413/8179250/1|[동아광장/김충식 칼럼]천황敎徒와 수령信徒]] [[황장엽]]도 북한의 수령제가 일제의 천황제를 상당 부분 참고해서 태어났다라고 예전에 발언했던것을 생각해 보면 '''북한의 주체사상 같은 시스템들이 일제의 천황제 같은 시스템들을 상당 부분 참고한게 맞다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비슷한 숭배 방식과 일화들로도 확인이 가능한데 과거 일제시절 일본에서는 학교 교실마다 천황의 어진(御眞)을 걸어두고 조회시간마다 강제로 묵념을 하게 하였다. 북한에서도 [[김일성]]과 [[김정일]]의 사진을 고이 모셔두는 것이 인민의 의무나 다름없다. 뿐만 아니라 '''교실'''에까지 걸어놓고 묵념을 한다.[* 관공서에 [[국가원수]]의 사진을 게시하는 국가는 생각보다 많은 편이다. 대한민국도 [[1998년]] 조례 제정 이전까지는 관공서에 대통령 사진을 게시했었다. 그러나 '''교실에까지 걸어놓고 심지어 묵념하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단순히 [[천황]]과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사진을 걸어놓는다는 공통점이 있다는게 아니라 '''그것을 숭배하는 것 까지도 북한의 주체사상은 일제의 천황제를 똑같이 따라하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 제국]] 시절 [[일본]]에서는 덴노의 어진영(사진)이 [[천황|덴노]] 그 자체인 것처럼 숭배시되었다. 심지어는 1940년 [[히로히토 덴노]] 시절에는 학교에 불이 나자 교장이 학생들이 아닌 어진영을 구할려고 화염 속으로 그대로 뛰어 들어갔다가 순직(?)한 경우도 있었다. 당시 일본 사회에서는 순직한 교장의 행동을 일본정신의 귀감(?)으로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전한다. 심지어 당시 사망한 교장에게는 "의로운 행동으로 순직한 사람"이라고 표창하는 등 그 행위를 미화함으로써 천황의 신격화가 더욱 심화되었다. 그런데 북한에서도 [[룡천역 폭발사고]] 당시, 불바다가 된 학교에서 [[김일성]]과 [[김정일]]의 사진을 구하다 죽은 교사가 있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학생을 구하다 죽은 게 아니라 덴노의 어진영을 구하려다 죽은 일제시절 일본인 교장처럼 똑같이 사진을 구하려다 죽은 것이다.''' 즉, 일제 시절에 있었던 일이 북한에서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https://www.peoplepower21.org/Mplaza/1275038|백두산 3대 장군의 초상화와 일본 천황의 어진영]] [[https://librekim.khan.kr/444|김정일 부자 사격 표적지 논란]] 사진은 아니지만 [[구호나무]]라는, 김일성 찬양문을 새겨놓은 나무를 지킨답시고 [[조선인민군 해군]] 병력을 동원했다가 '''[[해병]] 17명이 불타 죽은적도 있었다.''' 김일성 사진도, 친필도 아닌 나무에 새긴 김일성 찬양문[* [[구호나무]]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그나마도 조작된 것이 절대다수.(다만 1961년 백두산 청봉지역에서 발견된 구호나무 19그루는 진위여부가 확인되지 않았다)] 때문에 사람이 죽은 것이다. 게다가 일본제국에서는 매일 덴노가 있는 곳을 향하여 절을 하는 [[궁성요배]]란 것을 강요했는데, 이 역시 북한에서도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사진이나 동상에 절을 하는 형태로 똑같이 이어져 오고 있다. 북한 미사일 부대에서 10여년간 복무한 바 있는 탈북자 김춘애 씨는 북한의 군대에는 상명하달의 명령을 듣는 것 이외에는 의사전달 방식이 없었다고 말한다. 이는 완전한 위계질서 하에 천황의 권위를 철처히 떠받들었던 일본 제국주의의 군대와 흡사한 모습이다. 일본에서는 제국의 신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경찰을 키우고 헌병을 곳곳에 배치하는가 하면, 심지어 특별고등경찰, 약칭 특고라는 비밀경찰집단을 만들기까지 하였다. 특고는 ‘불순분자’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체포하고 고문을 일삼았다. 북한 역시 사회안전부가 인민보안성으로 승격하였고 일종의 경찰에 해당하는 안전원과 더불어 경무원[* 군사경찰(옛 이름은 헌병)에 해당한다.]들을 배치하여 주민들을 통제하고 있다. 특히 경무원들에게는 살인 면허가 주어져 항상 따발총을 들고 다닌다. 이 정도면 악명높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종교경찰에 맞먹거나 오히려 능가하는 수준이다. 또 모두 알다시피 [[국가안전보위부]]라는 [[KGB]] 뺨치는 조직을 만들어 반동분자를 수용소나 교화소에 처넣는다. 1945년 9월까지 일본에서는 황실에 대한 사소한 비판을 하는 자에게 조차 법으로 징역형을 내렸다.[* 지금도 일본 [[극우]]파의 [[테러]] 위협 등 천황에 대한 비판을 하면 곤란해지긴 하지만, 법으로 처벌되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 지금까지도 북한에서 김씨 일가에 대한 일체의 언급을 하는 자들을 요덕 같은 [[정치범수용소/북한|정치범수용소]]에 감금해오고 있다. [[북한군]]의 군가에도 [[일본군]]의 것을 그대로 따라한 것이 발견된다. 일본 군가 ‘천황을 위하여’를 ‘장군님을 위하여’로 가사만 조금 바꾼 북한 군대가 부르고 있다. 다시 말해 대동아 공영을 외치면서 아시아인들의 주권을 짓밟았던 일본군의 군가를 인민을 위한다는 북한군이 그대로 가사만 바꿔서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김정일의 전속 [[일본인]] 요리사였던 '[[후지모토 겐지]]'의 저서인 ‘김정일의 요리사'에서도 김정일이 주도한 술자리에서 김정일과 그 측근들이 일본 군가를 자주 불러 놀라기도 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선율에 다른 가사를 붙이는 작법은 '콘트라팍툼'이라 해서 서양음악의 오랜 전통이고, 서양음악을 수입한 근대 한국에서도 콘트라팍툼을 자주 활용했기에 일본 군가 선율에 가사를 바꿔 부르는 것은 단순히 제국주의 일본의 흉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심지어 한국 독립을 위해 창설된 독립군들도 일본 군가 선율을 가져다 쓰는 일이 많았다. 이 당시에는 문화도 [[약탈]]할 수 있는 물건처럼 여겨져서 일본 군가 활용에 더 거리낌이 없었기도 한데, [[문화]]가 [[소프트파워]]로 끼치는 영향을 중시하는 현대에는 일본군 군가를 쓴다는 것은 곧 일본 문화에 굴복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서 당시에는 없던 새로운 충격을 받는 것이다. 이에대해 미국 코네티컷 대학교의 김일평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김일성-김정일 체제에 대해 반대하는 무리는 모두 숙청하고 주민들을 정치범 수용소에 보내는 북한 사회의 모습은 '''결국 북한이 청산했다고 주장하는 [[일본 제국|일제]]의 잔재가 [[김일성]]-[[김정일]] 우상화의 근원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또한 [[국가정보원]] 해외·북한 담당 1차장과 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라종일 전 한양대 국제학부 석좌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실제로 [[김정일]] 본인 스스로도 죽기전에 가장 믿을 만한 측근 열 명에게 “국가 운영은 오늘 여기에 온 당신들이 맡아라. 어떤 방식으로든 ‘함께’ 나라를 운영할 방안을 생각해 보라”며 그 “함께 생각해 보라”며 말한 권력 방식이 일본의 천황제에 가깝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당시 김 위원장이 마치 일본의 천황제와 유사한 제도를 고려하고 있다는 보고를 들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라 교수에게 “그게 될 말인가, 그런 일이 되겠나”라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증언마저 존재할 정도이다. [[https://www.joongang.co.kr/amparticle/19427391|[단독] “김정일, 처음엔 3대 세습 생각 안해 … 천황제 방식 고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