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주체년호 (문단 편집) == 역사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주체연호 제정 기념우표.jpg|width=100%]]}}} || || {{{#FFF '''주체년호 제정 기념우표'''}}} || 사실 주체년호 표기는 [[김일성]]이 살아있던 [[1980년대]] 후반부터 비공식적으로 논의되어 왔다. [[최덕신]] 전 [[외교부장관|외무부 장관]]이 [[1986년]] 4월 [[월북]] 이후 쓴 저서 <김일성, 그이는 한울님>(1988)에서는 최덕신 본인이 김일성에게 '''자주력'''이나 '''주체력''' 사용을 제안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죽고 서서히 논의가 다시 되기 시작하는데 김일성 탄생 85주년을 하루 앞둔 [[1997년]] [[4월 14일]]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기관지인 청년전위에 실린 오영재의 시 <4월에 부르는 노래>에서 '''[[1912년]]을 김일성 기원 원년으로''' 표현이 등장하면서 표면화 되었다. 그리고 김일성 사망 3주기인 [[1997년]] [[7월 8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중앙군사위원회, 국방위원회, 중앙인민위원회, 정무원(현 [[내각]]) 5개 기관은 공동결정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혁명생애와 불멸의 업적을 길이 빛내일데 대하여>를 작성하고 다음날인 [[7월 9일]] 오후 7시 [[조선중앙방송]]과 [[평양방송]]의 '''중대방송'''을 통하여 주체년호 사용과 태양절([[4월 15일]]) 제정을 공식화하였다. 공동결정서에서는 제정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김일성|수령님]]의 혁명생애와 불멸의 업적을 길이 빛내이며 [[김정일|당중앙]]의 령도따라 수령님의 혁명위업을 빛나게 계승, 완성하려는 전체 당원들과 인민군 장병들, 군인들의 한결같은 지향과 념원의 반영이다. 그 후 북한은 동년 8월 25일 중앙인민위원회 명의로 <주체년호 사용규정>을 채택하고 정권 수립일인 9월 9일부터 주체년호 사용 원칙과 방법을 밝히면서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당장 [[1997년]] [[9월 9일]] 북한 정권 수립 49주년 기념사설과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중앙상임위원회가 [[김정일]]에게 보낸 축하편지가 방송을 통해 보도 되면서 공식적으로 처음 주체년호 표기가 사용되었다. 당시 사설에서는 북한 정권 수립년도인 '''[[1948년]]을 주체 37(1948)'''로, 축하편지에서는 '''1997년 9월 9일을 주체 86(1997)년 9월 9일'''로 표기하였다. 당시 [[조선중앙방송]] 등 [[북한]]의 언론 매체에서는 이 주체년호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였다. 아래는 조선중앙방송의 1997년 9월 10일 보도 내용 일부. >전국의 기관, 기업소, 공장, 농장들과 각계층 인민들이 공화국 창건기념일인 [[9월 9일]]부터 일제히 주체년호를 쓰기 시작했다. 조국의 최북단 [[온성군]]으로부터 분계연선도시 [[개성시]] [[판문군]]에 이르기까지 서해안의 곡창 열두삼천리벌로부터 동해안의 공업도시 [[함흥시]]에 이르기까지 전국 각지에서는 수령님의 한생과 더불어 밝아온 우리시대 주체시대의 요구와 수령님의 령도따라 승리와 영광에 찬길을 걸어오면서 간직한 절절한 념원을 빛나게 실현한 한없는 기쁨속에 첫 주체의 년호를 새기는 력사적인 화폭들이 펼쳐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