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주병진 (문단 편집) === 연예계 데뷔 및 전성기 === [[DJ]] [[이종환(방송인)|이종환]]이 부업으로 운영하던 카페 '셸부르'의 사회자를 거쳐 1977년, [[동양방송|TBC]] 전속 코미디언으로 연예계 생활을 시작했다. 원래 어릴 때의 꿈은 [[가수]]여서 1978년에 친누나와 [[TBC 젊은이의 가요제|해변가요제]]를 나가기도 했고, 이후 쉘부르의 가수를 뽑는 콘테스트에도 출전했는데, 쉘부르에서 노래 가사를 까먹는 바람에 그냥 내려오기는 뻘쭘해서 시간을 때우려고 생각나는 대로 웃기는 말을 했단다. 그런데 당시 심사를 하던 [[이종환(방송인)|이종환]]이 그의 웃기는 말을 듣고서는 사회자의 자질인 순발력이 있다고 평가해서 DJ로 특채했다고. 이후 TBC로 진출하여 신인치고도 상당한 활약을 펼치며 인기 개그맨이 되었다. 1980년 [[동양방송]]이 갑작스런 [[언론통폐합]]으로 [[한국방송공사|KBS]]에 통합된 뒤 짧은 기간동안 일시적 생활고를 겪었지만[* 몇 달 정도에 불과했지만, 원래 가난한 편이던 가정이라 그 데미지가 상당했다고 한다. 한번은 생활비가 떨어져서 KBS로 일자리를 구하러 가기 위해 모친에게 버스비를 청했으나 모친이 버스비 줄 돈도 없다고 말했다고. 결국 주병진은 3시간을 그냥 생 도보로 걸어서 KBS로 갔다고 한다. 돌아올 때도 그냥 그렇게 걸어서 밤 늦게 왔다고.] [[KBS 2TV]]에 금방 섭외되어 인기 개그맨의 자리를 유지했다. 특히, 당시 [[서세원]]이 MC를 맡던 [[MBC]] '[[영11]]'에 밀려 [[시망]] 위기에 몰린 '[[젊음의 행진]]'에 투입되어 [[시청률]]을 역전시키며 인기 개그맨으로 급부상했다.[* 1981년 12월 31일에 장충 체육관에서 연말 특집 젊음의 대축제를 찍었고 이때 주병진이 최양락을 족발뼈로 때린 사건이 터진다.] 1986년에 주병진은 [[MBC]]로 이적하였고 MBC의 여러 프로그램[* 80년대 후반에는 무려 [[뽀뽀뽀]]에서도 튼튼이 아저씨라는 이름으로 잠시 고정출연을 했었다. 역할은 튼튼이 아저씨로 어린이용 체조를 가르치는 역할. 주병진은 자신이 어린이들을 좋아해서 이 프로그램할 때도 좋았다고 한다. 하지만 동시대에 활동한 뽀식이 아저씨 [[이용식]]이나 배추 아저씨 [[김병조]]만큼 오래하지는 않았다.]에서 활약하며 인기를 끌었다. 당시 주병진은 [[청춘행진곡]], [[일요일밤의 대행진]] 등 [[MBC]]에서 하는 모든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그야말로 주역이었고 그가 없으면 프로그램 진행이 안 될 정도였다. [[MBC]]에서는 코미디 프로그램을 운영할 때 주병진을 중심으로 [[김병조]], [[이용식]], [[이주일]] 등을 내세워서 운영했다. 무명이었던 후배 [[이경규]]와 [[김정렬(코미디언)|김정렬]]은 주병진 옆에 끼워서 출연시키다시피 했을 정도였다. 이후 주병진은 1988년부터 방영된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메인 MC를 맡아 [[노사연]], [[김흥국]], [[이경규]] 등 막강 패널을 키워내며, [[MBC]] 예능의 대표 흥행 보증수표로 떠오르며 최전성기를 맞이한다. 일밤 오프닝에서 주병진은 양 손을 살짝 들고 '여러분의 시선을 모아, 모아, 모아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모아'라는 유행어가 어찌나 대단했던지 [[명인제약]]이 약 이름을 일부러 "모아겐"이라고 지어서 주병진을 방송광고모델로 쓴 적도 있다. 주병진의 신뢰감을 주는 신사 이미지를 잘 활용했던 유명한 광고다.]라고 말한 뒤 프로그램을 시작했고 이 대사는 당대 유행어가 되었다. 주병진은 당시의 주류였던 [[일본]]식 슬랩스틱 코미디 노선을 탈피해서 영미식 [[스탠드업 코미디]]를 [[대한민국]]형으로 적절히 바꾼 신사형 개그로 성공한 케이스. 그래서 별명도 '''개그계의 신사'''였다. 다만 일요일 일요일 밤에 당시의 테이블 위에서 토크하는 방식은 프리토크 형식이었지만 실제로는 잘 짜여진 콩트나 마찬가지였다. (스탠드업 특성상 즉흥적인 코미디라고는 할 수 없다.) 주병진의 강점은 미리 준비한 것을 뛰어난 연기력으로 준비하지 않은 듯 애드립치는 능력이다. 능청도 엄청나서 반대의 분위기로 바람잡다가 반전성 있는 애드립을 터뜨리는데 대단한 재능을 가졌었고, 그러한 과정에 필요한 연기력도 아주 일품이었다. 이때 그가 보여주는 입담과 애드립은 지금 봐도 세련되고 개그감이 살아있어, 현시점에서는 다소 유치하거나 지루한 동시대의 개그 프로나 토크쇼와는 달리 세련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렇다고 주병진이 토크에만 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대표 코너 중 하나인 배워봅시다는 다양한 것을 해보면서 몸개그와 상황극이 복합된 코너로 [[노사연]]을 스타덤에 올린 코너이기도 했다. (이 컨셉의 후속작이 [[이경규]]의 [[대단한 도전]].) [[노사연]]이 일밤에 고정 게스트로 출연한 것은 주병진, 노사연 모두와 친구인 [[이문세]]와 [[이성미]], [[신형원]]이 노사연을 주병진에게 추천했기 때문이었다.[* 주병진과 노사연이 60대에 같이 방송에 나와서 직접 한 말로, [[주병진]], [[이문세]], [[노사연]], [[신형원]], [[이성미]] 등은 70년대 후반 신인 때부터 사적으로 절친했다고 한다. 이문세와는 행사 MC 경쟁을 하다가 라이벌에서 친구로 친해졌다고. 친해지고 나서 다같이 잘 나가기 시작하면서, 그들끼리만 장기간 사적인 모임을 하며 각자의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서로 모니터해주고 토론한 적이 많았다고 한다.] 그들의 말에 동의한 주병진이 노사연에게 일밤 출연을 제의하자 노사연은 가수로서의 이미지가 손상된다며 출연을 거부했지만 주병진의 적극적 설득과 나머지 친구들의 부추김에 결국 출연을 결정했다고 한다. 처음에 노사연이 반대한 이유는 이미 그보다 전에 개그프로그램에서 섭외를 받아 단기 고정으로 [[최병서]]와 1달간 개그 연기를 잠시 했다가, 그 다음주 가요 프로그램에서 어린이 방청객이 자신에게 "저 코메디언 아줌마 노래 되게 잘한다"라고 말해서 마음의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유명한 [[김흥국]]의 [[유행어]] '''[[https://youtu.be/o1vquOVgUcE?si=_61yrcoljmwx3hJ-|"아, 응애에요~"]]'''도 일밤에서 게스트로 김흥국과 같이 방송했을 때[* 중년부터는 방송계의 시한폭탄으로, 웃음도 터뜨리고, 방송사고도 터뜨리던 김흥국이지만, 당시는 주병진 앞에서 주병진에게 그대로 리드당하는 연예인이었다. 이는 이경규 또한 마찬가지. 이경규와 김흥국은 서로 인지도가 올라가던 90년대초 과거부터 중년기까지 20여 년간 만나면 서로 끝없이 갈구고 들이대는 포지션이지만, 주병진에게는 둘다 꼼짝도 못했다. 참고로 겉으로만 보면 주병진이 김흥국의 동생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김흥국이 주병진을 형이라 부른다. 주병진은 빠른 59년생이지만 58년생 포지션을 놓지 않았고, 주병진의 절친 이문세도 설운도와 친구를 하고 김흥국을 동생으로 대한다.] 주병진이 직접 만든 유행어다. 당시 결혼한 김흥국이 태어난지 얼마 안 된 아들 이야기를 하자, 주병진이 "김흥국씨 아드님은 태어날 때부터 다른 아기들처럼 울지 않고 '아 응애에요'라고 하면서 김흥국씨 말투로 울었을 것 같다" 라고 말한 게 시작이다. 주병진과 이경규 콤비는 주로 주병진이 일방적으로 [[이경규]]를 골탕먹이고 억누르는 개그를 선보였는데 개그 스타일이 영미식 스탠드 코메디의 형태를 띄던 주병진이 [[이경규]]의 재능을 인정하여 [[이경규]]의 코미디 스타일(콩트가 가미된 일본식 만담)에 맞춰주면서 함께 방송에 출연하였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이 포지션은 이경규가 일밤 전 이문세의 별밤 진행방송에서 먼저 가지던 포지션이었고, 이문세의 추천으로 주병진이 이경규를 서브 포지션으로 쓰면서 기믹을 이어간 것이다. 단지 일밤의 파급력이 커서 후세에 그리 알려졌을 뿐, 이경규는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받쳐주는 개그맨[* [[서세원]]이 진시황 패러디를 하던 코너에서도 이경규가 받쳐주는 역할이었다. 유재석이 과거 무도에서 하던 가짜 중국말 "다찡 유찡" 하는 그 노래가 바로 이 코너다.] 기믹을 길게 가져 갔었다. 주병진의 하차 후 최수종[* 주병진과 이문세는 선배지만 최수종은 이경규보다 후배였고, 최수종 역시 신사 이미지는 있었지만 주병진처럼 까칠한 신사 기믹이 아닌 부드러운 훈남 신사 이미지라 부드러운 설정을 가져가고, 이경규가 방송 중 능청스레 쏘는 기믹이 되었다. 그리고 최수종은 생긴 게 주인공처럼 생겨서 이경규가 능청스레 쏘는 게 엄청 자연스럽게 흘러갔다.]과 일밤을 함께 하며 기믹을 바꾼 것이다. 이경규가 [[일요일 일요일 밤에]]에 출연할 수 있던 것은 주병진의 친구 [[이문세]]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군복무 이후 꽁트에서 조,단역[* 이경규는 군복무 이후 1년 정도 MBC [[서세원]] 라인에 있었고, 서세원이 주연이던 코너들에서 조단역을 많이 했었다.]으로 출연하던 이경규의 개그 실력을 좋게 평가한 이문세[* 이경규는 이문세도 어느 정도 무서워 했다고 한다. 이문세는 주병진보다 안 무서웠지 발라드 가수라는 이미지와 달리 가수 중에서 화나면 가장 무서운 가수로 유명했기 때문.]가 자신이 진행하던 유명 라디오 프로그램 [[별이 빛나는 밤에]]의 주말 공개방송에 이경규를 섭외했고 이것이 청취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자 이문세가 친구인 주병진에게 이경규를 보조 MC로 쓰라고 강력 추천하여 일밤에 출연하게 되었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주병진이 은퇴함으로서 병풍이나 쩌리... 소리를 들었던 [[이경규]]가 메인으로 성장했으니, 전화위복인 셈.[* 당시 둘의 메인 프로그램이었던 일밤에서 주병진이 사업에 집중하기 위해 떠나자 [[이경규]]가 전면에 나서게 되었는데, 앞 사람의 후광에 가려서 묻혔던 사람이 결국 전임자의 그림자에서 못 벗어나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본다면 [[이경규]] 자신도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이경규]]가 특히 무서워한 연예인 선배들이 2명이었는데 하나는 [[동국대학교|동대]] 시절 선배인 [[강석우]], 그리고 또 하나는 바로 코미디언 선배[* 주병진은 녹화하러 가는 길에 희극인실을 몇 초만에 휙 지나가도, 떠들던 개그맨들이 갑자기 10분 이상 조용해졌을 정도로 무서운 선배의 끝판왕이었다. 그나마 그냥 지나가지 않고 "조용히 해라"라고 대놓고 말하고 가면 주병진의 녹화가 끝날 때까지 혹시나 주병진에게 걸릴까봐 몇 시간이 조용했다고 한다. 후술될 최양락 족발 사건(당시 KBS) 이후 MBC로 갔는데, 이미 소문이 다 났을 테니 당연히 MBC 시절부터는 상식적으로 잘 깐족거리는 성격인 사람들조차 떨지 않았을 리가 없다. --잘못 까불면 족발뼈로도 때린다는데 겁이 안 날리가.-- ]이자 자신을 보조 MC로 데리고 있던 메인 MC 주병진이었다고 한다. 사실 이미 일밤 메인이 되면서부터 주병진은 PD들보다 더 결정권이 높은 포지션이었다. 주병진 본인이 여러차례 말했듯이 몇 달마다 새 코너를 만들 때 기획 아이디어를 본인이 내고 제목과 틀까지 다 짜서, PD들에게 주고 디테일을 채우라고 요구하기도 하였다. '''몰래카메라 코너의 기본 틀과 제목도 주병진이 직접 만든 것이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