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주문육 (문단 편집) === 죽음 === 비록 소자와 여효경은 평정되었으나 여효경의 아들인 여공양(余公颺)과 여효경의 아우인 여효매(余孝勱)는 여전히 항복하지 않고 있었다. 이에 무제는 주문육과 주적, 황법구 등을 다시 파견하여 여공양과 여효매의 토벌을 명했다. 이때 예장내사(豫章內史) [[웅담랑]]이 군대를 이끌고 주문육에게 합류하면서 군대가 1만에 달했다. 주문육은 [[오명철]]에게 수군을 이끌게 하고 주적에게 군량을 옮기게 한 뒤 자신은 군대를 이끌고 상아강(象牙江)으로 출병하여 금구(金口)에 성을 세웠다. 뒤에 여공양이 500명을 이끌고 거짓으로 항복하여 주문육을 사로잡으려고 했지만 음모가 발각되면서 주문육은 여공양을 가두어 수도로 압송했다. 주문육은 뒤에 배를 버리고 삼피(三陂)를 점령했는데, 한편 왕림은 조경(曹慶)에게 2,000명의 군사를 줘서 여효매를 구원하도록 명했고, 조경은 상중애(常衆愛)를 보내 주문육을 막게 하고 자신은 지름길을 따라 주적과 오명철을 공격하였다. 주적이 패배하자, 주문육은 금구로 달아났다. 이때 웅담랑은 주적의 패배로 인해 주문육을 죽인 뒤 상중애에게 호응하려고 했다. 주문육의 감군(監軍) 손백상(孫白象)이 웅담랑의 계획을 눈치채고 주문육에게 먼저 웅담랑을 제거하라고 권했는데, 주문육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럴 수 없다. 우리는 군대가 적지만 웅담랑은 군대가 많으니 만약 웅담랑을 없앤다면 부하들이 놀라 두려워하고 우리가 힘들어질 것이니 그들을 성심으로 대우하여 안심시키는 것이 좋다. 주적이 상중애에게 패배하여 배를 버리고 달아나서 주문육은 주적의 행방을 알 수 없었는데, 주적의 서신을 받고 난 뒤 매우 기뻐해서 웅담랑에게 서신을 보여주었지만 웅담랑은 그 틈을 이용해 주문육을 살해하였다. 무제는 주문육의 죽음을 슬퍼하여 주문육을 시중(侍中), 사공(司空)으로 추증하고 충민(忠愍)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561년, 무제의 사당에 배향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