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주리룬 (문단 편집) == 상세 == [[외성인]]과 [[본성인]]의 [[통혼]]으로 출생하였다. 외가는 [[타오위안]]의 유지이며, 아버지는 [[국부천대]] 때 넘어온 [[저장 성]] 출신의 [[군인]]이었다. [[국립대만대학]] 경영학과와 [[뉴욕 시립 대학교|뉴욕시립대학교]] 대학원 회계학 박사과정을 졸업하였다. 뉴욕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마친 뒤 대만에 귀국하여 모교인 국립대만대학에서 강사로 강의를 시작하였고 4년 뒤인 1996년 만 35세로 정교수로 임용되었다. 그리고 [[1998년]] [[대만]] [[입법원]] 의원([[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된 이후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다가 [[2001년]] [[타오위안]]현 현장선거[* 한국으로 치면 광역자치단체장(도지사)에 해당하는 직책으로 볼 수 있다. 한국에서도 국회의원이 도지사, 광역시장에 출마하는 일이 흔한만큼 대만에서도 마찬가지이다.]에 출마하여 [[민진당(대만)|민진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된 뒤 [[2005년]] 여유있게 재선에 성공했다. 2009년 지방선거에서는 재선 제한[* 대한민국의 지방자치단체장은 3선이 한계이지만 대만 지방자치단체장은 재선이 한계이다. 즉 3선에 출마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에 걸려 타오위안현장 선거에 출마하지 못하고 [[행정원]]장인 [[우둔이]]의 천거로 행정원 부원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 이후 [[2010년]] 타이베이현이 [[신베이]] [[직할시]]로 승격하자 행정원 부원장 자리를 사직하고 [[중국 국민당]] 소속으로 신베이 시장선거([[한국]]의 [[경기도]] [[도지사]]선거)에 뛰어들었다. [[파일:99494.jpg]] [[파일:461131313.png|width=600]] 재미있게도 이 때 신베이 시장을 놓고 격돌한 후보는 [[민진당(대만)|민진당]]의 [[차이잉원]] 대표. 팽팽한 접전이 계속되다 [[롄잔]]의 아들 [[롄성원]]이 [[총]]에 맞는 사건의 덕을 봐서 52.6% vs 47.4%로 [[차이잉원]] 후보를 누르고 당선된다. 그 이후 나름 시정을 잘 이끌었는지 [[2014년]] 선거에서 [[2014년 홍콩 우산 혁명]]의 바람을 타고 [[대만]] [[독립]] 바람이 거세게 불어 [[중국 국민당]] 후보들이 추풍낙엽처럼 썰려나갔는데도 [[민진당(대만)|민진당]]의 유시쿤 후보를 50.1% vs 48.8%로 아슬아슬하게 누르고 당선에 성공했다. 그 이후 [[마잉주]] [[총통]]이 사직한 [[중국 국민당]] 당대표(주석)에 지명되어 [[2015년]] 현재 활동중. [[시진핑]]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과 회담도 했다. [[중국 국민당]]의 [[2014년]] [[중화민국 지방공직인원 선거지방선거]] 참패로 지지율이 바닥으로 추락하자 대선 출마요구가 빗발쳤으나 기어이 불출마를 선언하고 [[훙슈주]] 후보를 [[2016년]] [[1월 16일]] 있을 대선 후보로 공천했는데 [[2015년]] [[8월 5일]] [[쑹추위]] [[친민당]] 전 대표가 대선에 뛰어들자 재빨리 단일화를 제안했다. [[파일:mvYOeav.jpg]] [[2015년]] [[8월 7일]] [[대한민국]]의 [[유정복]] [[인천광역시]]장과 [[http://www.newsis.com/pict_detail/view.html?pict_id=NISI20150807_0005757933|회담]]을 가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