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주더 (문단 편집) ===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전 === [[1927년]] 1월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 좌파는 장제스와 국민당 우파를 배제한 채 [[우한]]에 독자적인 [[우한 국민정부]]를 수립하였다. 이에 1927년 4월 국민혁명군의 [[상하이]] 점령 직후 [[장제스]]와 국민당 우파는 국민당 내의 공산당원을 학살하는 [[4.12 상하이 쿠데타]]를 벌여 [[국공합작]]의 붕괴를 선언했다. 주더도 체포되었으나 [[요리사]]를 가장하여 탈출할 수 있었다.[* 이때 붙은 별명이 [[주방장]](...) --주 주방장--] 이때 임신 중이던 아내 오약란(伍若兰)이 국민당 정부군에게 붙잡혀 사형당한다. 1927년 [[국공결렬]]이 일어나고 중국 공산당이 [[취추바이]] 노선에 따라 무장폭동을 준비하자 [[1927년]] [[8월 1일]] [[난창 폭동]]에 참여했지만 패주했다. 이후 [[유격전]]을 벌이면서 1만 명의 병력을 확보하였다. 1927년 11월, 마오쩌둥이 정강산에 근거지를 마련했다는 사실을 알고 휘하의 [[마오쩌탄]]을 파견하여 마오쩌둥과 접촉하였다. [[1928년]] 4월, 국민당군의 추격을 피해서 [[마오쩌둥]]이 [[추수폭동]] 이후에 점거한 정강산(井岡山)[* 여담으로 [[이문열]]은 정강산(징강산)이 [[수호전]]의 [[양산박]]을 모델로 하고 있다고 보았다. 실제로 마오쩌둥은 대장정 당시에도 수호전을 가지고 다니며 읽었을만큼 수호전이 표상하는 민중의 반항에 자기가 이끄는 [[홍군]] 세력의 항쟁을 투영하고 있었다. 지리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의 양산박으로 민중들에게 각인되기를 바란 것.] 해방구에 자신의 병력을 데리고 합류하여 [[정강산 투쟁]]을 전개했다. 이때부터 공산당군은 주마오준(朱毛軍)으로 불리기도 했다. 마오는 이론적인 전략전술론에는 일가견이 있었으나, 전문적으로 군사학을 공부한 적이 없기 때문에, 공산군의 실질적인 지휘는 주더가 맡았다.[* 공적으로도 마오쩌둥은 정치위원 역할을 맡았지만, 사적으로도 이때 마오쩌둥은 홍군 전사 출신이던 허쯔쩐과 연애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군내에서 '주 군장(军长)은 군량을 나르기에 열심이고, 마오 위원(委员)은 연애에 열심이네' 같은 풍자적인 노래가 불렸다고도 한다. 중국군에서는 정치장교를 정치위원라고 하며 줄여서 [[위원]]이다.] 그의 지휘가 탁월했기 때문에 "[[축지법]]을 한다", "[[도술]]을 부린다"라는 소문도 생겨났다고. 그리하여 4차례에 걸친 국민당군의 토벌에 대해 번번히 대승리하고, 주마오준은 15만까지 성장하였다. --[[장군님 축지법 쓰신다|수령님]]의 프로토타입?-- 이후 정강산 [[소비에트]]는 [[홍군]]이 대군이 되어 장기적 항전을 하기엔 좁았으므로 주마오준은 루이진으로 근거지를 옮겨 강서 소비에트를 건설했다. 중앙 소비에트라고도 불린 이 강서 소비에트는 [[창사 폭동]] 이후 국민정부의 토벌대상이 되었으나 [[1930년]] 12월 [[제1차 초공작전]]의 격퇴를 시작으로 [[1931년]] [[제2차 초공작전]], [[제3차 초공작전]]도 격퇴하여 1931년 11월,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혁명의 노선 문제를 놓고 공세적인 중심 도시 공세 전략을 주장한 28인의 [[볼셰비키]]를 비롯한 상하이 임시 당중앙 및 [[코민테른]] 고문 [[오토 브라운]]과 유격전을 주장한 [[마오쩌둥]]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고 결국 마오쩌둥은 루이진으로 이동한 당중앙에게 [[숙청]]당했다. 당중앙은 주더를 총사령관으로, [[저우언라이]]를 총정치위원으로 임명했지만 실질적인 지휘권은 [[오토 브라운]]이 잡고 있었다. [[제4차 초공작전]]까지는 [[열하사변]]의 발생 덕분에 넘길 수 있었으나 외부 사정이 정리된 후 [[한스 폰 젝트]]를 비롯한 독일 고문들의 지도를 받은 [[제5차 초공작전]]에서는 도무지 견딜 수 없어 결국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은 붕괴되었다. 이 때문에 공산군은 중국을 반 바퀴 돌아 서북쪽의 오지로 도피하였고, 이를 [[대장정]]이라고 한다. 이 대장정 기간 중인 [[1935년]] 공산당 지도부들이 모두 참여한 '''준의 전원 회의'''에서 마오쩌둥은 주도권을 회복하였다. 주더는 대장정 중 [[장궈타오]]를 따라가기도 하였으나[* 장궈타오를 지지해서 따라간 것이 아니다. 주더가 장궈타오의 부대로 전속해 있었을 당시, 마오와 장은 전략을 놓고 심각한 갈등을 빚었는데, 병력이 많았던 장은 마오의 부대를 기습해서 체포-처형하려 했다. 이 계획을 안 마오쩌둥은 장궈타오에 알리지 않고 먼저 섬서성을 향해 출발했고, 이 과정은 비밀리에 실행되었기 때문에 장궈타오 아래로 전속해 있던 주더는 계속 장궈타오와 함께 행동했다. 하지만 장궈타오 부대는 국민당의 집중공격을 받아 붕괴되고 주더와 류보청이 지속적으로 장궈타오에게 마오의 뒤를 따를 것을 요구하여, 장궈타오의 부대도 결국 마오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 장궈타오는 장정 중에 병력을 모두 잃었기 때문에 옌안에서는 더이상 마오에게 반항할 수 없었다.] 결국 마오쩌둥과 합류한다. 한편 주더는 전처를 잃은 후 대장정 중에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여성 당원 캉커칭(康克淸)과 재혼하여, [[1976년]] 노환으로 사망할 때까지 둘째 부인 캉커칭과의 결혼생활을 유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