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주긴완 (문단 편집) == 생애 == [[홍콩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사업 때문에 홍콩으로 건너가 어린 시절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잉와 컬리지[* 홍콩명 英華書院. 영어명 Ying Wa College. 1818년 11월 11일 영국의 선교사 로버트 모리슨이 개교한 홍콩의 중학교이다.] 시절에는 학업과 농구에 병행하며 2008-09시즌 디오세샨 컬리지와의 결승전에서 14분을 소화해 60-45로 격파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었고, 그와 동시에 엘리트 베스트 대상을 수상하였다. [[파일:온칭 농구단 시절의 10번 주긴완.jpg|width=520]] 이후 2009-10시즌, 온칭 농구단(安青)에서 프로로 데뷔해 뛰어난 경기를 펼치며 리그 3위를 기록하였고, 1년 뒤인 2010-11시즌에는 난화 농구단(南華)에서 9분을 소화해 팀의 승리를 이끄는 등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파일:명지대 시절의 주긴완.gif|width=250]] 그리고 나이키 주최로 개최된 일대일 길거리 농구대회에 참가해 NBA의 레전드였던 [[코비 브라이언트]]의 지목을 받고 배운 뒤, 성인 홍콩 국가 대표팀에서 활약할 정도로 빨리 성장하며 유망주로 꼽혔다. 그러나 2011년 동아시아 대회 준비를 앞두고 있었을 때 어머니의 전화로부터 외할머니가 대장암으로 별세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으며 결국엔 국가대표팀마저 은퇴해 버렸지만, 국제대회에서 친분을 쌓았던 전직 국가대표 [[이승준(농구선수)|이승준]]의 도움을 받아 한국과 연이 닿았고 2012년, 명지대학교에 입학하였다. 빅맨 급의 신장은 아니었으나 소속 대학의 전력상 센터를 맡아 팀의 주축으로 활약했다. 대학 입학을 기점으로 본래 추구하던 개인기 위주의 농구 대신 팀플레이 위주의 농구를 익히게 된다. 18세(한국 나이 19세)에 농구를 접한 주긴완은 구력이 짧은 데다 엘리트 체육을 경험하지 않았음으로 적응에 어려움이 있었고, 한국식 농구는 물론이고 합숙 등의 한국의 체육 문화에 생소함을 느꼈지만, 팀에 도움이 되는 선수가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처음부터 하나씩 배워가며 받아들였다. [[파일:모비스 주긴완 눈물.jpg|width=300]] 대학생 3학년이었던 2015년에 얼리 엔트리로 드래프트에 신청했지만 본인의 이름은 불리지 못하고 떨어져 버렸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2016년 신인 드래프트에 도전한 끝에 [[유재학]] 감독의 부름으로 가장 마지막에 4라운드 10순위로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울산 현대모비스]]에 지명되었는데, 그 감격에 겨운 나머지 눈물을 펑펑 쏟아내면서 눈길을 모은 장면이 홍콩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드래프트에서 보인 모습과 선수 개인의 특이 이력으로 인해 농구팬들의 많은 격려와 응원을 받았다. 일례로 선발된 당해, 모비스 신규 선수들이 구장을 찾아 인사와 소감을 나누었을 때, 1라운드 1순위로 지명된 이종현보다 주긴완에게 쏟아진 함성과 박수가 컸다. 유재학 감독은 물론 구장을 찾은 기자들 조차 인지할 정도였는데 이후 한 기자가 이날에 대해 묻자 주긴완은, 자신이 아니라 감독 및 코칭스태프에게 쏟아진 것이었다며 겸손하게 답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