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주기철 (문단 편집) === 장년기, [[신사참배]] 거부와 순교 === >'''자, 오늘 성도들 여러분이 [[신사참배]]를 하겠다고 하면 주 목사가 더 이상 고문을 받지 않도록 해 주겠소. 그러나 반대로 여러분들이 계속 신사참배 반대를 고집한다면 주 목사는 이 못 위로 걷는 고문을 당하게 될 것이오!''' >---- >[[일본 헌병]] >'''성도 여러분, 나 주기철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직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오직 주님과 여러분이 함께 다짐한 것을 굳게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 >주 목사는 못위로 걸어갔다. [[1930년대]] 후반 [[민족말살정책]]으로 가고 있었던 [[조선총독부]]는 [[황국신민]]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총독부 경무국은 [[1938년]] 2월 이른바 ‘기독교에 대한 지도 대책’이라는 것을 수립하였고, 학교와 학생뿐만 아니라 교회와 일반 기독교인들에게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기독교회에서 파견된 목사 토미다(富田)는 경성일대를 왕래하며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일제의 압박이 가해지자 다수의 [[개신교]] [[목사]] 들은 "[[신사참배]]는 [[우상숭배]]가 아니라, 그냥 국가의 의식[*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국가'는 다름아닌 일본 제국이다. 때문에 신사참배를 국가 의식이라는 미명으로 수용하는 것은 기독교도로서 우상숭배 금지라는 계명을 어길뿐만 아니라, 스스로 일본인임을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하므로 하나님과 민족을 동시에 거스르는 이중의 잘못을 범하는 셈이다.]"이라는 도미다의 뜻에 동조하면서 [[신사참배]]를 하였고, 다른 사람들도 신사참배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주기철을 비롯한 여러 목사들은 신사참배에 반대했다.[*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알려진 [[손양원]] 역시 그 중 한 명이었다. [[대광중학교(서울)|대광중학교]]와 [[대광고등학교]]를 세운 [[한경직]] 역시 이 축에 있었는데, 얼마 안 가 굴복하고 만다. 비록 많은 [[조선인]]이 참배를 했고 [[가톨릭]]을 비롯한 종교계도 신사참배를 했지만, 먼 훗날 한 목사는 이에 대해 반성하며 사죄해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지는 않는다.] [[평양]]에 있던 [[개신교]] [[미션스쿨]]인 [[숭실학교]]와 [[숭의여학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폐교당하기도 했다. 주기철 목사도 신사참배에 끝까지 반대했다.[* 주기철 曰, 도미다 목사께서는 십계명을 알고 계십니까? 일본에도 신앙심에 목숨을 걸 수 있는 훌륭한 이들이 많다 들었습니다. 목사님이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신다면, 조선인에게 참배를 권하기보다는 가까운 일본인에게 복음을 먼저 전하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결국 그 해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구속당했지만, 일제는 결사 반대하는 주기철 목사를 설득하기 위해 곧 풀어주었다. 그러나 곧 다시 붙잡히고, 풀려났다가 다시 붙잡히는 경우가 잦아졌다. 점점 구속되는 시간이 길어지고, 일제는 주기철 목사에게 "신사참배를 하라, 그러면 풀어주겠다"고 회유한다. 하지만 주기철 목사는 이미 결심했고, 일제의 엄청난 [[고문]]이 이어졌다. 조선인 출신 고문기술자인 배만수 형사가 주기철 목사를 맞이했고, 농우회 사건의 간부였던 조만식이 산정현교회의 장로라는 사실을 빌미삼아 교인들을 몰아세웠다. 아내 오정모 사모의 신앙도 못지않았다. 자녀들은 모두 도망가고 가정 형편도 궁핍했지만, 약한 소리와 앓는 소리 대신 감옥에 있는 남편을 면회한 자리에서 "당신은 꼭 승리하셔야 합니다. 결단코 살아서는 이 붉은 문 밖을 나올 수 없습니다."라고 당부했다.[* 당신이 살아서 돌아오면 내 남편이 아니며 죽어서 돌아오면 내 남편이라고 했다는 일화도 있다.] 1940년에는 주기철 목사를 굴복시키려는 일환으로 남편을 면회 온 자리에서 [[일본제국 경찰]]들에게 붙들려 아내와 아들이 보는 앞에서 '''여자들에게 가했던 고문'''을 당했다고도 한다.[* 주기철 목사의 아들 주광조 장로의 증언. 이 충격으로 인해 주 목사의 아들 주광조 장로는 한동안 [[실어증]]을 앓기도 했다.] 후에, 주 목사의 입관예배에서도 조용히 일어나 비장한 얼굴로 "여러분, 지금은 울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후, 7개월만에 석방된 주기철 목사는 다시 교회 강단에 서게 되었다. 주기철 목사는 신자들에게 '다섯 종목의 나의 기도'[* 죽음의 권세에 대한 승리, 오랜 고난을 감내하는 것, 이웃의 안녕을 비는 것, 의로움에 살고 죽는 것, 혼을 주님께 맡기는 것]를 연설하며 [[신사참배]] 반대의 의지를 더욱 더 굳건히 지켰고, 이틀 뒤 일제는 다시 주 목사를 구속했다. 10월[* 1940년 10월 23일]에는 목사 대리로 수요예배를 진행하려던 장로를 구속하여 주 목사가 있던 지하로 끌고 내려가 구타하는 등 산정현교회를 압박해 주기철을 파면시켰다. 가족까지 동원한 온갖 모진 고문과 회유에도[* 주기철 목사를 다룬 만화에서 이게 묘사되는데 온갖 고문에도 그가 거부하자 고문실 바로 옆방에서 유리창문을 통해 지켜보던 아내를 붙잡아 주기철이 보는 앞에서 욕설을 하며 주먹질과 발길질을 퍼붓는 게 나온다.]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은 주기철 목사는 병원으로 이송되어야 했으나, [[4월 21일]] 아내와의 마지막 면회 후 5시간 뒤인 밤 9시 병으로 숨을 거둔다.[* 같이 수감되었던 안이숙 여사의 말로는, [[일본제국 경찰]]이 주사를 놔서 살해했다고 한다.] >여보, 따뜻한 [[숭늉]] 한 사발이 먹고 싶소. 주기철 목사가 [[평양]] 형무소에서 마지막 면회를 하면서 아내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라고 한다. 기나긴 수감 생활과 잔혹한 [[고문]]으로 무너질 대로 무너진 그의 앙상한 육신은, 목을 축이고 속을 덥혀줄 따뜻한 숭늉 한 사발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다"고 말씀한 [[예수]]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주기철 목사의 장례식은 5일장으로 치러졌고, 그의 유해는 [[1944년]] [[4월 25일]] [[평양]] 근처 돌박산 기독교 공동묘지[* 이태석 목사, 최봉석 목사, 박관준 장로, 이현속 장로 등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순교]]하여 안장된 곳이다.]에 안장되었다. [youtube(KnfQ7juMU5I)] 주기철 목사의 4남 주광조 장로[* [[2011년]] [[6월 29일]] 소천.]의 [[간증]].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온갖 고문 속에서도 복음으로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신앙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주기철 목사는,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1968년]] [[9월 18일]] [[성경]]을 비롯한 유류품이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1983년]]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정에 기념비가 세워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