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종육 (문단 편집) == [[삼국지(정사)|정사]] == 14세에 산기시랑이 되었고, 기민하고 농담을 잘해 아버지의 풍모가 있었다고 한다. 228년에 [[제갈량]]이 기산으로 진군했을 때 [[조예]]가 직접 나서려고 하자 종육은 다음과 같은 말로 조예를 말린다. >대체로 책략은 직접 전투를 하지 않고 조정에서 세운 계략만으로도 승리하는 것을 귀중하게 여기며, 전공은 장막에서 세우는 것을 숭상합니다. 전당 위에서 내려가지 않고도 천리 바깥의 승리를 결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가가 중앙을 지키고 있어야 사방을 그 위세로 지원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 대군이 서쪽으로 원정에 나선다면 비록 위세는 백배로 강해지겠지만, 관중의 비용이 증가되어 손실을 입는 것이 하나가 아닐 것입니다. 또 더운 날씨에 행군을 하는 것은 시인에게는 소중한 소재가 되겠지만 천하의 지존으로서는 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이후 황문시랑으로 직책을 옮기고 조예가 온갖 공사를 지어 백성들이 힘들어지니 종육은, >수해나 가뭄으로 들지 않았을 때에도 창고는 텅텅 비어야 합니다. 대체로 이러한 일은 풍년에가 가능한 일입니다. 지금은 마땅히 관내의 황무지를 개간해 백성들이 농사에 전념하도록 해야 합니다. 라고 하니 조예가 그의 말을 따랐다고 한다. 239년에 [[조방]]이 즉위하자 산기상시으로 임명되어 정시 연간(240 ~ 249년)에는 [[호소#s-2]]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추천했다. 244년 [[조상(삼국지)|조상]]이 촉을 공격하고 여의치 않아 구원군을 요청하자 종육은 조상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다. >묘승지책(廟勝之策)이란 화살과 돌을 사용하지 않는 것을 가리킵니다. 왕자의 군대는 정벌에 나서도 전투를 하지 않습니다. 방패나 도끼로 유주목 묘증을 굴복시킬 수가 있었지만 물러나서 적을 받아들일 수가 있다면 오한을 강관에 풀어놓고 [[한신]]을 정형으로 초빙할 필요도 없습니다. 가능하면 진격하고, 어려우면 물러나는 것이 예로부터 당연한 병법이었습니다. 공후께서는 이러한 점을 잘 살피십시오. 조상이 아무런 전공도 세우지 못하고 돌아오게 되니 종육은 이 일로 미움을 사 시중으로 좌천되었다가 위군태수로 밀려났으며, 249년에 조상이 죽자 중앙으로 돌아와 어사중승, 시중, 정위 등으로 승진한다. [[태평어람]]에 따르면 맹달을 상서였던 종육이 신성태수로 부임하는 [[주태(조위)|주태]]한테 넌 미천한 출신이 뭐가 그리 출세를 빨리 하냐고 농담을 걸었다. [[사마의]]가 신성태수로 부임하는 주태를 놀리라고 시킨거긴 하고 주태도 재치있게 '그러는 넌 아버지가 쩔면서 승진은 왜 못하냐?' 로 받아친다. 세어의 내용인데 여기서는 상서 [[종요]]라고 나와 있으나 종요는 이미 죽었고 태평어람에는 종육이라고 나와 있다. 대화의 시점이나 제반 정황으로 볼 때 저 대화의 주체가, 태위를 거쳐 226년 이래 태부를 지내다 230년에 죽은 조위의 최고위급 인사인 종요일 수는 없으니 오류임이 분명하다. [[삼국지집해]]에 소개된 설들처럼 종육 아니면 [[종회]]의 와전으로 보이는데, 주태의 신성태수 임명 및 위의 대화가 이루어진 시점을 언제로 보는 지가 핵심 관건이다. 주태가 맹달의 반란(227 –228) 이후에 사마의에 의해 벽소되고 도합 9년의 거상을 거쳤지만 부친, 모친, 조부가 주태가 벽소되자마자 딱딱 3년 간격으로 죽었을 것으로 보는건 너무 무리한 추정이므로 실제 소요된 총시간은 좀더 길게 잡아야하고 노필의 설처럼 청룡 연간으로 보는건 너무 이르다. 또한 만약 청룡 연간으로 본다면 225년 생으로 당시 10살 전후인 종회는 아닌 것이 된다. 참고로 종회는 제왕 정시 연간에 비서랑으로 관직을 시작한다. 제왕 때인 250년(가평 2년,삼국지 왕창전), 251년(가평 3년, 삼국지 삼소제기)에 '신성태수 주태'라는 기록이 있는 걸 볼 때 이 시기가 하한이 될 것인데, 진경운의 설처럼 대략 제왕 초(대략 240년대 초중반)로 보는게 적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종육은 산기시랑 또는 산기상시였고 종회는 비서랑 또는 상서랑이었다. 둘 다 가능하지만 태평어람의 기록이 있으니 종육 쪽이 더 가능성이 큰 듯하고, 세어에서 '상서'로 표기한 것은 하작의 설처럼 뒤에 역임한 관직으로 칭한 것으로서 서술하는 사건의 시점과는 맞지 않다. 만약 종회가 맞는 것으로 본다면 이건 '상서랑'의 오기가 된다. 여기서는 태평어람에 따라 종육의 일화로 기록한다. 254년에 [[하후현]] 일당이 [[사마사]]의 암살을 꾀하다가 붙잡히자 종육이 하후현을 심문한 뒤 형의 집행을 했으며, 255년에 [[관구검]]의 반란 때는 지절을 들고 양주와 예주로 가서 사면령을 반포해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돌아와 상서로 임명되었다. 257년에 [[제갈탄]]의 반란 때는 [[사마소]]와 함께 계책을 논의했으며, [[손일#s-1]]이 항복하자 다른 이들은 모두 손오가 이 일로 큰 피해를 입어 더이상 구원을 보내지 못할 것이라 했지만, 종육은 손일이 이끌고 온 병사가 300명에 불과하니 수춘의 포위를 풀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해 258년에 제갈탄의 난이 평정되자 종육은 청주자사, 후장군이 되었다가 259년 4월에 서주도독에 봉해져 서주의 군사를 총괄한다. 263년 겨울에 사망해 시호는 혜후라 했으며, 아들 [[종준#s-1]]이 뒤를 이었지만 동생 종회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해 조문을 가지 못했다고 한다. [[하후혜]]와 논쟁을 많이 했지만 하후혜의 견해가 채택되는 일이 많았다고 하며, [[관로]]와의 일화도 전해진다. 《[[세설신어]]》에는 어려서부터 동생 종회와 함께 명성이 있어 [[조비]]가 찾아오자 종육은 무섭고 떨려 식은 땀이 비오듯 흐르는데, 조비가 어찌 땀이 흐르냐고 묻자 두렵고 황공해 땀이 국물처럼 흐른다고 대답했다. 종회는 그대는 어찌 땀이 흐르지 않냐고 하자 두렵고 떨려서 감히 땀이 나오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또한 아버지가 낮잠을 자는 틈을 타서 종회와 함께 술을 마셨는데, 종육은 배례하고 마셨지만 종회는 마시면서 배례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아버지 종요가 왜 배례했냐고 하자 종육은 술을 마시는 것은 그것으로써 예가 되기 때문에 감히 배례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지만 종회는 왜 배례하지 않았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훔치는 것은 본래 예가 아니기 때문에 배례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