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종묘 (문단 편집) ==== [[고려]] ==== [[고려시대]]에 들어서 최초의 종묘 기록은 [[성종(고려)|성종]] 7년 처음 오묘제(五廟祭)를 정하고 묘호를 올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다음 해 4월에 종묘 건설공사를 시작해 3년 뒤 공사를 마쳤다.[* 고려사 성종 세가엔 성종이 공사 현장에 가 자재 운반을 ''''직접'''' 도왔다고 한다.] 본격적인 [[종묘제례]]가 시작되었으며, 처음엔 신라의 1세대당 1위의 신주를 모시는 제도였다. 하지만 성종 9년에 5묘 9실제를 채택하여 종묘에 9실을 설치하고 네 위패는 불천위로, 나머지 다섯 위패는 세대가 지날 때마다 옛 신위를 옮겼다. 지속적으로 9실제를 이용하다가 덕종 때 태조, 혜종, 현종 세 군주를 '''불천지주(不遷之主)'''로 정했다. 예종 대엔 9실제를 썼다. 인종 대에 잠시 5묘제로 바뀌었지만 의종 대에 들어서서 천자식 7묘제로 개편, 구실을 만들어 신위를 보관한다. 또한 별묘를 만들어서 다른 군주들을 섬겼다. 이후 몽골의 침략을 겪으면서 태묘를 재정비하게 되는데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개경(개성)의 종묘는 무너져 버렸고 강도(江都)에 태묘를 다시 짓는다. 고려 고종은 [[태조(고려)|태조]], [[혜종(고려)|혜종]], [[현종(고려)|현종]], [[선종(고려)|선종]], [[숙종(고려)|숙종]], [[예종(고려)|예종]], [[인종(고려)|인종]], [[신종(고려)|신종]], [[강종(고려)|강종]] 9명을 다시 모셨다. 이후 원종이 [[1270년]] 개경 환도하면서 7묘제 종묘를 재건설한다. 하지만 묘호 같은 천자식 예법은 [[원 간섭기|아들 충렬왕 대부터 쓰지 못하게 된다.]] 그리하여 충렬왕 때 다시 5묘제로 바뀐다. [[충선왕]] 때는 기존의 5실 외에 동서에 협실을 하나씩 두고 동실에는 [[문종(고려)|문종]]과 [[명종(고려)|명종]]을, 서실에는 [[혜종(고려)|혜종]]과 [[현종(고려)|현종]]을 모셨다. 또한 [[공민왕]] 시기 [[이제현]]의 상소를 보면 [[강화도]]에서 나온 후 형식적으로는 1당 5실의 제도지만 실제로는 22개의 신주를 일렬로 모셨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는 하나의 종묘 건물을 3개의 실로 나누고, 실은 다시 방으로 나누는 동당이실이방 제도로서 조선의 종묘 제도에 영향을 주었다. 《고려사》엔 군주가 태묘에 제사 지내러 갈 때의 예법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 고려사 악지엔 태묘 악장이 기록되어 있으며 예종, 공민왕 대의 악장만이 남아있다. 예종은 태조, 혜종, 현종, 덕종, 정종, 문종, 순종, 선종, 숙종 아홉 명을 모셨고 공민왕은 태조, 혜종, 현종, 원종,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아홉 명을 모셨다. 고려의 종묘는 고려왕조가 멸망한뒤 새로운 왕조의 종묘 부지가 되어 헐리고 태조 이하 고려 국왕들의 위패는 배에 실어서 강에 띄웠는데, 강물에 떠내려가서 도착한 곳에 사당을 짓고 그곳에서 위패를 맡아 보관하게 된 것이 [[연천]] 숭의전(崇義殿)의 유래라고 알려져 있다. 이 숭의전도 현존하는 것은 [[6.25 전쟁]] 때 불타서 다시 지은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