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종묘 (문단 편집) ==== [[발해]] ==== [[발해]]도 3성6부제와 같이 당의 제도를 다방면에서 수용한 나라이므로 종묘를 두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발해라는 나라가 워낙에 자체적으로 남긴 문헌 자료가 없는 데다 관련 유적 발굴 결과도 발해의 종묘 흔적을 보여주는 흔적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2011년]]에 한국과 [[러시아]]가 공동으로 추진하던 연해주 콕샤로브카 1평지성터[* 발해 5경 15부 62주 가운데 안변부(安邊府)의 부성(府城)으로 추정되고 있다.]에 대한 네 번째 발굴조사에서 '종묘'의 흔적으로 보이는 유적이 확인되었는데, 발해 당대의 것이 아니라 10세기 발해가 [[거란]]에 의해 멸망한 뒤에 현지에서 일어난 부흥세력이 지은 종묘의 흔적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http://www.cha.go.kr/newsBbz/selectNewsBbzView.do;jsessionid=ikqCCaHd6U8C0UayCFrtSL03LmUJ1kLOaCWEpyAzeL3a1NHBgAEuQHOn1QV3orOl?newsItemId=155696993§ionId=b_sec_1&pageIndex=108&mn=NS_01_02&strWhere=&strValue=&sdate=&edate=|#]][* 그나마도 지어놓고도 오랫동안 쓴 흔적은 보이지 않았는데 이는 이곳을 세운 세력(즉 안변부를 중심으로 발해 부흥운동을 일으킨 세력)이 얼마 못 가서 진압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송기호 교수에 따르면 해당 유적은 7묘제, 그러니까 천자국의 제도를 따라서 지어져 있다고 하며, 같은 시기 [[당나라]](그리고 당나라의 제도를 본받은 고려와 조선)에서 후한 명제 이래의 동당이실(同堂異室)[* 같은 건물에 방만 다르게 해서 신주를 모신다는 의미. 현존하는 한국의 종묘 역시 하나의 건물(同堂) 옆으로 후대 왕들의 묘실을 붙여 짓느라고(異室) 하나의 건물로 늘어난 것이다.]에 따라 종묘를 지었던 것과는 달리 고대 [[주나라]]의 제도를 본따서 동당동실(同堂同室)[* 신주 하나마다 독립된 건물을 한 채씩 더 지어서 신주를 모신다는 의미.] 형식으로 태묘를 가운데 두고 그 앞으로 세로 2열로 소목을 배치한 구조였을 거라고 한다. 그리고 유적에서는 쪽구들을 배치한 흔적도 확인되었는데, 죽은 자가 살아있을 때처럼 모셔지는 공간이라서 살림집처럼 온돌을 설치한 것이라고.[* 출처: 송기호 <발해건축사 연구동향과 콕샤로브카 1성터 건물지의 성격>] 중국의 [[주례]] 고공기에 따르면 종묘는 좌묘우사(左廟右社)[* 종묘는 왕이 거주하는 궁성에서(왕이 남쪽을 보고 앉은 것을 기준으로) 보아 왼쪽, 사직은 궁성 오른쪽에 배치하도록 규정한 것.]라는 원칙에 따라 왕이 거주하는 궁성 동쪽에 짓도록 되어 있어서 발해에서 한때, 혹은 멸망 직전까지 수도로 기능했던 상경이나 동경 등의 유적에서 실제 발해 당시의 종묘 흔적이 발견된다면 동부 구역에서 발견될 가능성이 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