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종묘 (문단 편집) ==== [[신라]] ==== 이후 [[고려]]와 [[조선]]의 종묘로 이어지는 중국식 유교적 형태의 종묘 제도의 도입은 [[통일신라]] 초기에 처음으로 나타났다. 이는 전통적 시조묘-[[신궁]]과 별개의 추모시설로 공존했으며, 상세한 기록을 통해 후대에 이어지는 완전한 형태임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의 유교적 종묘시설의 위치는 [[경주 월성]] 북쪽, [[첨성대]] 남쪽, 황남동 123-2번지 건물지로 추정되고 있다. 다만 [[삼국유사]]에서는 삼국사기의 기록보다 앞서서, 아직 [[고구려]]가 멸망하기 전인 [[665년]]에 당나라에서 주도, 사실상 강요한 백제 [[부여융]]과 신라 [[문무왕]] 간의 취리산에서의 회맹을 기록한 금서철계([[단서철권]])의 반쪽을 신라의 종묘에 보관하게 했다고 하는데, 신문왕 이전에 이미 신라에 종묘가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다만 '기록상 명확하게' 등장하는 건 좀 더 시간이 지나서 [[687년]] [[신문왕]] 때 [[성한왕|태조]], [[진지왕]], [[김용수(신라)|문흥왕]], [[태종무열왕]], [[문무왕]]의 5위를 모셨다는 기록이 나온다. >대신을 보내 조상묘에 제사를 올렸다. 제문에 아뢰었다. > >“왕 아무개는 머리를 조아리고 재배(再拜)하며 삼가 태조대왕(太祖大王)ㆍ진지대왕(眞智大王)ㆍ문흥대왕(文興大王)ㆍ태종대왕(太宗大王)ㆍ문무대왕(文武大王) 영전에 아룁니다. 저는 재주와 덕이 없이 숭고한 유업을 이었기에, 자나깨나 걱정하고 애쓰느라 편안하게 지낼 겨를이 없었습니다. > >종묘의 보살핌과 하늘과 땅이 내리는 복에 힘입어 사방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화목하며, 외국에서 오는 손님들이 보물을 실어다 바치고, 형벌이 밝고 송사가 없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요즈음 임금의 할 도리를 잃어서 정의가 하늘의 뜻에 어긋났는지, 별의 형상이 괴이하고 해는 빛을 잃어가니, 두려워 몸이 벌벌 떨려옴이 마치 깊은 못과 골짜기에 떨어지는 듯하옵니다. 모모 관직에 있는 아무개를 보내 변변치 못한 제물을 차려 놓고 살아 계신 듯한 신령 앞에 정성을 드리며 엎드려 바라옵나이다. > >자그마한 정성을 밝게 살피시고 하찮은 몸을 가련히 여기시어, 사철의 기후를 순조롭게 하시고 오사(五事)의 징후에 허물이 없게 하시며 곡식이 잘되고 질병이 없어지며 입고 먹는 것이 넉넉하고 예의가 갖추어지며 안팎이 편안하고 도적이 사라지며 자손들에게 넉넉히 남겨 오래도록 많은 복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삼가 아뢰옵니다.” >---- > - 《삼국사기》 - 〈신라본기〉 신문왕조 7년(687) 4월 [[혜공왕]](765 ~ 780) 때 이르러서 [[미추왕]]을 김씨 왕조의 시조로 삼고,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의 2위를 [[삼국통일]]의 공을 감안해 [[불천위]]로 정하는 동시에 혜공왕의 조부 [[성덕왕]]과 부친 [[경덕왕]]의 친묘(親廟) 2위를 합쳐 5묘로 삼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일반적인 종묘의 운영과는 다른 신라만의 독특한 방식이다. 제후식 오묘제 종묘를 만들었음에도 태조, 태종 같은 천자식 묘호를 올린 것 또한 신라 종묘의 특이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천자가 7묘, 제후가 5묘를 두도록 한 기존의 예법과의 절충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형식적으로나마 당의 제후국을 자처하고는 있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천자로써 행세하면서([[외왕내제]]) 천자국 제도에도 맞고 제후국으로써의 제도에서도 벗어나지 않는 중간 즈음의 형식(나중에 당에서 제동걸 때를 대비해서도)을 취했었다. 고려 후기 [[공민왕]]도 반원 자주개혁을 하면서 관제를 황제국식으로 복구하고 7묘제 태묘를 만들었지만 원종 이후의 왕에게는 묘호를 따로 올리지 않았다.][* 실은 중국의 경우도 건국 초기에는 7묘를 채우지 못하였다. 모든 제도란 항상 엄격한 구속력을 가지고 적용되는 게 아니라 그때 상황에 따라 탄력적으로 운용할 수 있기 때문에 일부 단편적 사례를 끄집어 와서 [[천자]]와 [[제후]]를 구별짓고 단정하는 것은 주의가 필요하겠다. 전혀 특이하지 않은 것도 선입견을 가지고 끼워 맞추면 특이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중국에서도 천자의 6군(5군) 체제와 제후의 3군 체제를 군력의 필요 여부에 따라 탄력적으로 운용했던 것을 들 수 있으며, 심지어 황제를 폐하(陛下)가 아닌 전하(殿下)로 부른 기록도 있다.] >... 제36대 혜공왕(惠恭王) 때에 비로소 5묘(五廟)를 제정했는데, 미추왕(味鄒王)을 김씨의 시조로 세우고 태종대왕(太宗大王)과 문무대왕(文武大王)은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한 큰 공덕이 있었다 하여 모두 대대로 제사를 지내는 조상([[불천위]])으로 삼고,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사당 둘을 합하여 5묘(五廟)를 만들었다.... >---- > - 《삼국사기》 잡지 제사 신라 하대를 연 [[선덕왕]]은 경덕왕의 신위를 내보내고 부친 개성대왕을 부묘했다. 성덕왕의 신위를 그대로 둔 이유는 선덕왕의 어머니 정의태후가 성덕왕의 딸이었기 때문에 외가 쪽을 통해 정통성을 인정받으려는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덕왕의 뒤를 이은 [[원성왕]]은 성덕왕과 개성대왕의 신위를 내보내고 조부 흥평대왕과 부친 [[효양|명덕대왕]]을 부묘함으로써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하려고 했으며 이후 [[애장왕]] 때는 별묘(別廟)를 세워 [[불천위]]였던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의 신위를 따로 봉안하고 자신의 직계 4위인 고조부 명덕대왕, 증조부 원성왕, 조부 [[인겸|혜충대왕]], 부친 [[소성왕]]을 부묘했다. 애장왕 이후의 부묘 상황에 대한 기록은 없다.[* 애장왕이 굳이 종묘에 조부와 부친을 모신 것은 왕위가 불안정한 가운데 정통성을 내세우려는 노력이었으며 이후 애장왕이 피살된 뒤 거기 모신 조부, 부친이 종묘에서 쫓겨났을 확률은 100%이다.] 이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시기''' ||<-5> '''5묘'''[* 선정 당시 국왕과의 관계] || '''비고''' || || [[신문왕]] 7년(687) || [[성한왕|태조대왕]](시조?) || [[진지왕]](고조부) || [[김용수(신라)|문흥대왕]](증조부) || [[태종무열왕]](조부) || [[문무왕]](부) || || || [[혜공왕]]대(765~780) || [[미추왕]](시조) || [[태종무열왕]](불천위) || [[문무왕]](불천위) || [[성덕왕]](조부) || [[경덕왕]](부) || || || [[선덕왕]]대(780~785) || [[미추왕]](시조) || [[태종무열왕]](불천위) || [[문무왕]](불천위) || [[성덕왕]](외조부) || 개성대왕(부) || || || [[원성왕]] 원년(785) || [[미추왕]](시조) || [[태종 무열왕]](불천위) || [[문무왕]](불천위) || 흥평대왕(조부) || [[효양|명덕대왕(부)]] || || || [[애장왕]] 2년(801) || [[미추왕]](시조) || [[효양|명덕대왕(고조부)]] || [[원성왕]](증조부) || [[인겸|혜충대왕(조부)]] || [[소성왕]](부) || [* 무열왕, 문무왕을 봉안한 별묘 운영] || 또한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경주 황복사(皇福寺)지 삼층석탑]]의 1942년 해체 수리 중 발견된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사리장엄구|사리함]]에 '종묘성령선원가람'(宗廟聖靈禪院伽藍)'이라고 적힌 명문이 확인되었는데, 불교를 국가차원에서 숭상했던 나라답게 사찰이 종묘의 기능을 맡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833478.html|#]] 신라 시대에는 특정 인물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또는 창건주가 자신의 개인적인 소원 성취를 위해 발원해 짓는 절을 원찰(願刹)이라고 불렀고, 신라에서 국왕들은 물론 고위 귀족들도 모두 이러한 원찰을 가지고 있었다. 원찰(원당)은 고려 시대는 물론 숭유억불을 기조로 삼았던 조선 시대까지 근근히 이어졌는데,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고 왕릉 관리를 맡기기 위해 지었던 [[흥천사]]나 왕실로부터 [[영녕릉]]과 [[광릉]]을 관리하는 역할을 부여맡게 된 [[신륵사]]와 [[봉선사]], [[정릉(서울 강남)|정릉]] 관리를 맡은 [[봉은사]], 조선 [[정조(조선)|정조]]가 [[융릉|현륭원]] 관리 및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중창한 [[용주사]]도 원찰에 속한다.[[http://www.buddhism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9382|#]] 왕실에서 발원해 지은 원찰(원당)의 경우는 사실상 '불교화된 종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