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종묘 (문단 편집) === 한국사의 시조묘 === 고대의 한국 왕조 또한 전통적인 시조묘(始祖廟)/조상숭배 신앙이 존재했다. 이런 시조묘, 시조상 등은 사서에서 중국의 종묘와 같은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고조선]] 건국신화에서 건국자와 천신을 혈연적 관계로 묶은 것에 기초해 신단수를 천신 제사와 더불어 조상 제사를 지낸 성지로 보며, [[고조선]] 때부터 시조 숭배의 전통이 시작되었다. 이후 [[삼국시대]] 각 나라의 관련 기록에서 초기부터 시조묘에 제사지냈다는 기록이 있어 이를 근거로 든다. '종묘(宗廟)'라는 단어가 한국사에서 처음 등장한 것은 [[고구려]]였다. [[동천왕]] 때 [[위(삼국시대)|위나라]]의 공격으로 [[환도성]]이 파괴되자 [[평양성]]을 새로 쌓으면서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외에 3세기까지 종묘에 대한 여러 기록이 나와, 종묘라는 시설의 존재를 확실히 입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의 종묘는 이후 왕조처럼 완전한 유교식이 아니라 기존에 존재하던 시조묘의 연장선상에 있었기에, 왕실이 아닌 유력 귀족 가문에서도 자신들만의 종묘를 만들었다는 기록도 나온다. 또 다른 근거로는 647년([[보장왕]] 5년)에 [[유화부인|동명왕모]]의 소상이 3일이나 눈에서 피를 흘렸다는 기록인데, 위패가 아닌 신상을 모셨다는 것 역시 중국식 유교의 종묘는 아니다.[* 유교에서도 소상을 모시는 예가 없지는 않다. 공자를 모신 공묘 [[대성전]]이 대표적인 사례.] [[백제]]의 경우 동명묘와 구태묘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중국 사서인 《책부원귀》, 《수서》에서는 구태설을 채택하여 '백제에서 사계절의 가운데 달마다 왕이 하늘과 오제의 신에게 제사지내고 시조 구태묘를 세워 일년에 네 번 제사를 지낸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동명설을 채택하고 있으며, 온조왕 때 [[동명왕]]과 국모(國母)에게 제사지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또한 백제는 시조신 제사를 지내면서 동시에 천지신 제사를 올렸는데, 백제 [[법왕(백제)|법왕]] 때부터는 천지신 제사나 시조신 제사보다 불교의례가 중시되는 경향을 보이며, 이후 백제 관련 기록에서는 제사 관련 기록이 보이지 않다가 멸망 당시 [[부여풍]]이 제사권만을 갖고 있었다는 기록이 짤막하게 나오는 것이 전부다. [[신라]]에서도 초기부터 전통적 시조묘가 존재했으며, 이는 시조인 [[박혁거세]]를 모시는 역할로 추정된다. 6세기에 시조묘를 대체하는 [[신궁]](神宮)을 짓고 4계절마다 제사를 드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 신궁은 신라 말기까지 신라왕이 새로 즉위하면 반드시 제사를 크게 지내는 장소였다.[* 신라의 신궁에서 모셔지던 신의 위격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 덧붙여, 조선 이전에는 불교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경주 황복사와 같은 [[불교]] [[사찰]]이 신라 왕실의 종묘적 기능을 담당하기도 했다.[[http://db.history.go.kr/id/gskh_005_0080_0030_0030|종묘 기능을 명시한 황복사지 사리함]] 하지만 삼국의 어느 기록이나 유교적인 형태의 종묘는 아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