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종계변무 (문단 편집) == 평가 == 드러난 정보만으로 보면 명나라가 허위 보고를 곧이 곧대로 믿고 자료를 잘못 기재했고, 황제가 잘못을 인정하고 수정을 지시했음에도 이를 제때 하지 않고 미루는 바람에 발생한 외교 분쟁이었다. 하지만 그 뒤에는 정치 및 외교적인 논리도 상당 부분 숨겨져 있다는 해석이 존재한다. 당장 조선은 태조 이성계의 조상이 이인임으로 기재되면서 왕실의 위신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당장 조선 왕실은 이성계의 고조부까지 추존하여 자신의 계보를 밝히고 왕실의 권위와 정통성을 주장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조선 왕실의 조상이 이자춘이라더니 명나라 기록을 보니 이인임이네요? 이거 족보 조작인가요? 게다가 모시던 왕도 4명이나 처죽였다면서요? ~~솔직히 세 명 죽인 건 맞다~~ 이거 막장이네요?"와 같은 식으로 조선이 주장하는 정통성 자체를 훼손시킬 수 있는 문제였다. 조선 왕실이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자료를 들이대면서 반박해봤자 중국이 그렇게 기록했다는 것 한 방에 신뢰도 자체를 나락으로 보내버릴 수 있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조선에 심각한 약점이 될 수 있는 사안이었기에 꾸준히 사신을 보내면서 제발 좀 고쳐달라고 한 거였고, 사신이 갔다올 때마다 그거 고쳤는지 안 고쳤는지 확인을 하면서 일희일비하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이러한 점으로 인해 종계변무는 명이 손에 쥐고 있던 최강의 [[조커]] 카드였다. 조선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릴 것이고, 그만큼 명에서는 이를 무기삼아 조선을 ~~[[조교]]~~ 가지고 노는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한 마디로 조선은 어쩔 수 없이 명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게 되는거고, 간혹 명을 의향을 거스르는 것과 같은 소리를 늘어놓으면 "종계..."란 이야기를 꺼내 바로 [[데꿀멍]]시킬 수 있는 소재였다. 그렇기에 명에서는 일부러 마치 해주고 있는 것처럼 또는 해주려는 것과 같은 모습을 보이면서, 결국 제대로 처리 안해주는 식으로 애간장을 태운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 명나라의 입장에서 보자면 조선왕조실록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지만 실록의 내용을 고치는 것은 이만저만 중대한 일이 아니다. 그것도 왕조의 개창자인 태조의 실록을 고치는 일이다.[* 다만 실록의 내용을 고치는 것이 절대 금지되어 있던 조선과 달리, 명나라는 이미 편찬한 실록을 고치는 것이 가능했다. 실제로 명나라의 태조실록은 [[건문제]] 때 처음 편찬되었으나 [[영락제]] 때 영락제에게 불리한 기록을 삭제할 목적으로 개수되었다.] 또한 대명회전은 일종의 행정 법전이다. 이 문제가 결국 1584년이 되어서야 해결 가능했던 것도 대명회전의 개정판이 1587년에 나왔기 때문이다. [[청구야담]] 같은 야사에서 말하는 것처럼 홍순언과 석성의 드라마틱한 에피소드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일각에서 대명회전을 다 새 판본으로 다시 찍으려면 어마어마한 비용이 든다는 문제를 거론하기도 하는데, 명나라에서 그걸 핑계로 대며 미뤘을 가능성은 있으나 실제로는 비용 문제는 거의 없는 편이다. 대명회전 180권 중에서 한권의 일부만 고치는데 많은 비용이 들리도 없을 뿐더러, 1393년에 찍은 책을 200년이나 계속 쓰고 있을리가 없다. 노후화 되어 폐기되고 증쇄해서 다시 배포하는 과정이 최소한으로도 수차례 있었을텐데, 이인임 석 자를 이자춘으로 고치는 간단한 오탈자 교정 작업을 가지고 비용 부담이 들어서 못 해주겠다느니 어쩌니 운운했다면 이는 단지 해주기가 싫은 것이었을 뿐이다. 2008년경 미국 지명위원회가 '독도는 한국령'이라고 표기함에 따라 일본이 [[데꿀멍]]했던 일을 종계변무와 연결지은 [[https://www.joongang.co.kr/article/3248043|칼럼]]도 있다. 지나친 도식화와 싱거운 결론이 좀 걸리지만 종계변무를 간결하게 잘 소개하고 있으니 한번 읽어 보자. 사실 이 종계변무 문제는 [[윤이·이초의 옥사]]에 출발했고, 불만을 품게 된 급진 사대부들이 마침내 온건 사대부들을 숙청하기 시작한다.[* [[이색(고려)|이색]]•[[우현보]]•[[권근]] 등, 많은 유신(儒臣)들이 이 사건에 관계되었다는 이유로 [[청주시|청주]]로 유배당했다.] 명나라와의 외교는 그렇다 쳐도 외세를 끌어들여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던 음모였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내내 이 사건을 일으킨 고려 왕조를 비판한다. 이로 인해 [[공양왕]]도 얼마 못가 목숨을 잃게되었다. 실제로 공양왕조차도 도저히 봐줄 상황이 아니어서 윤이이초지난의 주동자들을 색출하라고 했다. 다른 한편으론 [[위화도 회군]]도 실은 명나라와 비밀 문서를 들며 이것이 왜 나쁘냐고 하지만 정작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연려술기술 등에선 실은 명나라가 아닌 이성계 본인이 독자적인 판단으로 했다는 이야기로 반론을 한다. 실제로 이는 삼별초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원나라의 힘을 빌린 것과 매우 유사한 상황이고, 더욱이 온건 사대부들 측도 고려와 명과 관계를 정상화하려고 노력을 했다. 실제로 윤이이초지난의 주동자들을 색출하려고 했을때 정몽주는 무리한 색출은 금물이라고 했고, 반면 공양왕을 비롯한 이성계 측의 급진 사대부들이 주동자를 색출했다. 이 밖에 오늘날 [[이성계 여진족설]]을 반박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근거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성계를 무고할 거라면 이인임의 아들이라는 것보다 여진족이라고 떠드는 쪽이 몇 배는 파괴력이 있고, 명의 입장에서도 이성계를 여진족이라고 봤으면 고려인 이인임의 아들이라는 말을 그대로 받아 적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진족의 후계인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 시절에서도 대명회전 원본으로 적을까 말까 하면서 간을 봤을 뿐이지 "조선 왕실이 우리와 같은 여진족의 후손이 아닌가..." 라는 말은 꺼내려고도 들지 않았다. [[분류:명나라]][[분류:조선]][[분류:한중관계]][[분류:조명관계]][[분류:외교 사건 사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