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종계변무 (문단 편집) === 일화의 진위 여부 === 일단 '''이 시기 예부 상서는 석성이 아니다'''. 석성이 예부 상서라는 이야기가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지 알 수가 없는데, 연려실기술에 종계변무와 관련된 만력제 시기 예부 상서들의 이름은 하나 둘이 아니다. 만력제 시기만 봐도, >'''예부 상서 육수성(陸樹聲)'''이 대답하는 제사에 , “성지를 받들어보니, 그 나라의 전후 주사(奏詞)를 상세히 황조실록(皇朝實錄) 안에 편찬하여 넣으라 하셨사오니, 새 회전에는 조지를 기다려서 이어서 편수할 적에 더 넣을 것입니다.” 하였으며 >'''예부 상서 만사화(萬士和)'''의 제사에, “조선 국왕의 그 선조의 원통함을 가슴 아파해서 재삼 변명하여 아뢰기에 이르렀다. 다만 전에 이미 명백한 조지를 받들었으며, 제왕의 말씀이 한 번 나오면 미덥기가 사철과 같으니 누가 감히 더하고 감함이 있으리요. 마땅히 그 나라의 전후의 주사(奏詞)를 황조실록에 편찬해 넣는 한편, 그것을 초록하여 사관에 회부하고, 회전 편수를 기다려서 기재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였다 >'''예부 상서 서학모(徐學謨)''' 등이 말하기를, “만약 회전이 완성되면 곧 나누어 주도록 아뢸 것이니 칙서를 내릴 필요는 없다.” 하였다. >17년 만력 12년 갑신에 주청사 황정욱이 돌아올 때에 가지고 온 '''예부 상서 진경방(陳徑邦)''' 등의 제사에, “개정하여 편찬한 문사는 어람을 거치지 않습니다. 간행하면 초고를 가려 뽑아서 보일 것이며, 성지를 받들어 그대로 써서 왕에게 줄 것입니다.” 하였고 >유홍이 명 나라 서울에 갔는데 예부에서 회전은 어람을 거치지 않았으므로 주기가 어렵다고 하여, 유홍이 꿇어 앉아서 청하기를 마지 않고 땅에 머리를 두드려서 피가 흐르니, '''상서 심리(沈鯉)'''가 여기에 감동되어 갖추어 아뢰어 사신이 오는 편에 부쳤던 것이다. 길지 않은 기간 동안 언급되는 예부 상서가 계속 바뀌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나마도 실제로 편찬이 진행되는 도중이었던 서학모의 전임 예부 상서들인 마장강, 반성, 왕석작(王錫爵) 등의 이름은 제외된 것이다. 실제 발언과 재임 기간 등을 고려하면 서학모와 그 후임인 진경방이 예부 상서를 역임하고 있던 시기에 완성된 것으로 보이고, 이 와중에 수정되었을 것이다. 사실 기록들을 뒤져보면 석성은 모두 시랑으로 기록된다. 그럼 석성이 정말로 예부 시랑을 지낸적이 있느냐하면 이것도 아니다. 그럼 석성은 뭘하고 있었는가 하면, [[석성]] 문서에서도 알 수 있지만 [[장거정]]을 둘러싼 치열한 정쟁 속에서 사임해서 놀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석성이 공부 상서에 임명되면서 중앙 정계에서 다시 언급된 시기는 1587년. 이미 대명회전은 나온 뒤이다. 이후 석성은 1590년 호부 상서, 1591년 병부 상서를 역임하게 된다. 그럼 사직하기 전에 예부 시랑을 지냈을 수도 있지 않는가라고 할 수도 있지만, 석성과 관련되어 확인할 수 있는 자료에서 시랑을 지낸 것은 단 하나 뿐이다. '''병부 좌시랑'''. 시기적으로도 안 맞지만 도대체 병부 좌시랑이 종계변무에 얼마나 관여를 할 수 있었을까도 의문스럽다. 사실 석성과 관련해서 더욱 유명한 일화는 이미 언급된 임진왜란 시기이다. 실제로 석성을 조선에서 높이 평가한 것은 종계변무가 아니라 임진왜란 파견 관련이었고, 석성이 주도적으로 조선 파병을 이끌었던 것은 기록된 사실이다. 실제로 통문관지와 연려실기술의 원전으로 보이는 정태재의 '국당배어'에는 해당 사건이 임진왜란 출병 시기의 일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홍순언이 공금을 돌려서 구했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없다.[* 실제로 감히 공금을 빼돌렸다면, 조선왕조실록에도 언급이 나왔을 것인데, 해당 기록은 전무하다.] 그리고 홍순언의 문제인데, 홍순언은 실록에서 계속 언급된다. >박영준(朴永俊)·김귀영(金貴榮)·노수신(盧守愼)·김계(金啓)·민기문(閔起文)·유희춘(柳希春)이 모두 승문원에 모이고 영상과 좌상도 이어 이르렀다. 존시사(尊諡使)와 존호사(尊號使)의 문서를 살펴본 뒤에 다시 의논하여 확정하고, 주상이 중국 사신을 접견할 때에 종계(宗系)의 악명(惡名)을 변정(辨正)하는 일에 대해 대략 먼저 말로 하고 이어 단자(單子)로써 자세히 기록하여 주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였다. 영상이 예조 판서 박영준에게 단자를 기초(起草)하게 하고 좌상이 조금 다듬어서 김계에게 주어 '''통사 홍순언(洪淳彦) 등을 시켜서 한어(漢語)로 번역하여''' 단자를 만들어 예조에 주어 아뢰도록 하였다.''' >-선조 5년 9월 11일 갑오 1번째기사 1572년 중국 사신이 올 때 종계 변무하는 일을 논의하다 즉, 홍순언은 선조 초기에도 꾸준히 대표적인 역관으로 언급되고 있다. 즉, 홍순언이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별 것 없다. 실제로 번역을 홍순언이 계속했고, 1584년의 경우는 상통사로 언급되는 등 종계변무 시기의 역관의 대표로 보인다. 즉, 홍순언은 역관의 대표로 상을 받은 것이다. 홍순언이 공신 2등을 받았다고 하지만, 홍순언은 7명의 2등 공신 중 한 명이고[* 1등공신은 윤근수, 황정욱, 유홍이다. 이들은 사절단의 대표역이고, 유홍에 대해서는 상단에도 언급이 있다.], 사실 3등 공신인 [[이산해]], [[기대승]], [[정철]], [[유성룡]] 등은 실제로 사신으로 간 인물들이 아니라 요청문을 쓰는데 참여한 인물들이다. 그리고 중인에게도 공신으로 책봉한 것은 선조가 정말로 기뻐했기 때문인 동시에, 특이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시기에도 선조는 호성 공신에 온갖 사람들을 다 집어넣었다. 심지어 말을 다룬 마의도 포함되어 있을 정도. 또한 공신으로 책봉되면 당연히 봉군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