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종계변무 (문단 편집) === 뒷 이야기 === 숙종 때 편찬된 사역원 역사와 유명한 역관들의 일화를 기록한 책인 '통문관지(通文官志)'에서는 이 극적인 문제 해결이 역관 홍순언의 활약 덕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연려실기술]] 별집인 '사대전고'의 [[http://db.itkc.or.kr/m/dir/view?grpId=&itemId=BT&gubun=book&depth=5&cate1=H&cate2=&dataGubun=%EC%B5%9C%EC%A2%85%EC%A0%95%EB%B3%B4&dataId=ITKC_BT_1300A_0440_010_0070|'역관' 파트]]에도 기록되어 있다. 역관에 관한 다른 재미있는 일화도 많으니 한번 읽어 보자. 비록 연려실기술 자체가 야사인 데다, 실록이 번역된 오늘날에 와서는 사료로서의 가치가 평가 절하되긴 했지만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다.] 홍순언이 명종 임금 시절 역관 자격으로 명나라 [[연경]]에 사행[* 使行, 사신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길을 떠남.]을 갔을 때 통주란 곳에서 [[홍등가]]에 들러 놀다가 어떤 아름다운 기녀를 보고 그녀를 불러 접대를 받으려고 방에 들어갔는데, 그 기녀는 이상하게도 소복을 입고 방에 들어와 있었다. 홍순언이 이를 의아하게 여기고 사연을 물어본 즉, 이 여인은 원래 [[저장성|절강성]] 출신으로 대갓집의 규수였으나 가족을 [[전염병]]으로 모두 잃었는데, 부모의 관을 고향으로 모셔가서 장례를 치러야 하나 장례 비용이 없어 이를 마련하기 위해 기방에 몸을 팔았다는 것이었다. 이에 홍순언이 불쌍하다 생각해 장례 비용으로 3백금을 마련하여 장례 비용까지 대주기로 결심하고, [[섹스|남녀 관계]]를 맺지는 않았다. 여인이 '이름을 말씀해 주시지 않으시면 돈을 받을 수 없다'면서 사양하기에 그는 홍씨 성의 역관이라고만 말하고 기방에서 나왔다. 사행에 동행하던 다른 사람들은 홍순언을 가리켜 멍청하다고 비웃었다. 문제는 이 돈이 공금(...)이었기 때문에 홍순언은 공금 횡령죄로 투옥되고 만다. 그리고 1584년, 주청사를 보내며 위에서 언급한 대로 일을 성사시키지 못하면 역관의 목을 날리겠다고 왕이 엄포를 놓자, 역관들이 돈을 갹출해 홍순언이 횡령한 공금을 갚아주는 대신 [[총알받이|죽을 게 뻔한 자리인 수석 통역관 자리를 떠맡겼다.]] 어차피 투옥된 상황에서 일이 잘 풀리면 좋고 혹 잘못되어도 한이 되진 않을 것이라는 이유. 물론 홍순언 역시 이 제안을 당연히 받아들였다. 한편 홍순언에게 도움을 받은 여인은 이후 예부시랑 석성에게 의탁했다가 그의 후처가 됐다. 석성은 이 때 후처가 조선인 역관에게 큰 도움을 받은 일화를 전해듣고는 크게 감명을 받았고, 그 후부터 조선에서 사신이 오면 홍 역관이 사행길에 왔는지를 계속 수소문했다. 그리고 석성이 찾던 '''그 홍씨 성을 가진 역관'''이 1584년 주청사와 함께 명에 제 발로 입국한 것이다. 소식을 들은 석성은 북경성의 조양문까지 사람을 보내 후한 대접을 했다. 통상적으로 대국인 명나라의 신하들은 목에 힘주면서 뻗대기 일쑤였던 까닭에 사신 일행은 많이 당황했다. 그리고 몸종 수십 명과 함께 어떤 귀부인이 나타나 홍 역관을 찾았는데, 홍순언은 하도 놀란 나머지 사신단 사이로 숨으려고까지 했다. 석성이 '그대가 통주에서 은혜를 베푼 것을 기억하시오? 우리 부인이 하던 말을 들어보니 그대는 천하에 의로운 선비입니다. 이제라도 서로 만나게 되었으니 내 마음이 크게 놓이게 되었소."하고 저택에서 크게 잔치를 열고 부인이 직접 잔에 술을 채워 홍순언에게 올렸다. 물론 이렇게 끝났으면 그냥 미담 정도로 끝났겠지만~~공금 횡령한 건 넘어가고~~, 중요한 점은 석성이 당시 '''예부상서'''(!)[* 현대 대한민국으로 치면 '''[[외교부장관]] 겸 [[교육부장관]] 겸 [[문화체육관광부장관]] 겸 국가기록원장'''. 명의 상서(조선 식으로는 [[판서]]) 자리는 중국 전체에 6명(이, 호, 예, 병, 형, 공)밖에 없는 고위 관직이고, [[유교]] 문화권에서 "예"의 범주로 처리하는 일은 매우 많았다.]였다는 점이다. 즉, 조선의 종계변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부서의 총 책임자였다. 어쨌든 각설하고, 그동안 조선의 사신들은 예부의 관리들을 만나 형식적인 답변만 겨우 받고 돌아오거나, 아예 고관들에게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석성은 홍순언의 의기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고, 후처의 일도 있었기에 보은을 한다는 생각에 두 팔을 걷어붙이고 사신단에게 염려하지 말라는 말을 하면서 적극적으로 종계 문제에 개입했다. 그동안 예부에서는 명나라에는 '그런 자료가 없다, 조선이 가져온 자료를 믿을 수 없다'면서 무시로 일관하고 있었는데 상서이던 석성의 개입으로 '''2백 년 동안 묵혀두었던 문제가 단 한 달만에 프리 패스'''(…) 되었다. 물론 조정에서 대신들이 "옛날 기록들을 고치는 것은 안 그래도 번거로운 일이다. 게다가 당대에 수정되지도 않은 것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텐데 이제 와서 외국의 말만 듣고 그걸 고쳐야 하는 이유가 있나?"라 신나게 [[태클]]을 걸어댔다. 하지만 해당 일을 책임지는 것이 예부이고 해당 부서의 상서 석성이 "과거에 영락제와 정덕제께서 내리신 성지도 있고, 잘못된 정보가 있으면 고치는 것이 맞다"라며 적극적으로 주장해서 그 결과 다시 한 번 개정 허락을 받아낼 수 있었다. 사실 허락은 예전에도 두 차례 받은 일이 있었다. 하지만 그 때는 명의 예부에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미뤄와서 안 되었을 뿐이었고, 이번에는 허락까지 나온 데다가 예부의 수장인 상서가 열성적으로 나서니 수정 자체도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 있었다. 그 결과 1584년 조선의 사신들은 종계 문제와 사왕 문제가 수정된 대명회전의 필사본을 받을 수 있었다. 이후 홍순언이 돌아올 때, 부인이 10개의 상자에 각각 비단 10필을 담고 말하기를 "이것은 첩이 손으로 짜서 공(公)이 오시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하였다. 그는 사양하여 받지 않고 돌아왔는데, 압록강(鴨綠江)에 이르러 깃대를 든 자가 쫓아와 그 비단을 기어이 전하고 돌아갔다. 그 비단 끝에는 모두 ''''보은(報恩)'''' 두 글자가 수놓여 있었다. 결국 [[서자]] 출신 [[역관]]인 홍순언은 [[중인]] 신분이었지만 가장 큰 공로자였기에 면천허통 조치가 내려졌고, 당릉군(唐陵君)으로 책봉됐다. 역관으로서는 최초의 공신 작호를 받은 것. 이후 홍순언이 있던 마을을 가리켜 보은단동(報恩緞洞, 현재 [[서대문구]] 미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에도 석성과 홍순언의 인연은 계속 이어졌다. '''[[임진왜란]] 당시 병부상서(현재의 국방부장관)가 석성'''이었고, 조선이 왜군의 앞잡이가 되어 대륙으로 쳐들어올 것이라 생각하던 명나라는[* 명나라는 전쟁의 진도가 너무 빠르다는 것에 일본과 조선이 짜고 치는 전쟁을 벌여 명나라를 끌어들이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을 품고 있었다. 피난 중인 사람이 진짜 조선 왕이 맞는지 선조의 얼굴을 아는 사람을 보내 확인을 시키기도 했다.] 이때 석성이 가장 적극적으로 조선의 사정을 변호하자 원군 파병을 결정했다고 한다. 당시 기록에는 '조선이 어육[* 魚肉, 생선과 짐승의 고기를 아울러 이르는 말로, 짓밟히고 으깨어져 아주 결딴난 상태를 뜻하는 비유.] 신세를 면한 것은 모두 석 공과 당릉군 덕분'이란 말까지 있었다고 한다. --착한 일 하나 잘하면 이렇게 본인과 나라에 보탬이 된다. 다만, 그 착한 일을 사비가 아니라 나랏돈으로 했다는 건 함정(...)-- 다만 홍순언의 일화는 실록을 비롯한 정사에서 기록되지는 않은 야사이다. 참고로 해당 일화는 배한성의 고전열전 난중일기에서 따로 3회씩이나 편성하여 전하고 있다. 여담으로 석성은 심유경과 함께 국제 사기를 추진하다가 결국 1597년 발각되어 감옥에 갇혔다. 그는 조선 왕에게 편지를 보내 구명 활동을 부탁하였으나 당시 선조로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미 전쟁을 재개한 판에 만력제를 자극했다가는 쫓겨나는 걸로 끝나지 않을 판이라 미안해하면서도 결국 침묵했고 석성은 옥사했다.[* 이는 류성룡이 이순신 구명에 나서지 않은 것과 비슷하다.] 대신 석성의 아들 석담과 그 가족들이 이주하는 건 받아줬으며, 이들은 황해도 해주에 자리를 잡아 석성은 [[해주 석씨]]의 시조가 된다. 선조는 그 뒤 석담을 수양군에 봉하며 석성을 칭송했다. 이 일화와 매우 비슷한 이야기가 [[최인호(작가)|최인호]]의 장편 소설 [[상도]]에도 실려있다. 홍등가에서 처음 손님을 받는 소녀를 거금들여 구해주고 이 때문에 몰락했다가 소녀가 [[고관대작]]의 부인이 되어 은혜를 갚는다는 흐름이 매우 비슷하다. 차이라면 홍순언은 공금이고 [[임상옥]]은 빌린 장사 밑천, 은혜를 갚기 위해 찾는 과정이 홍순언은 본인이 다시 중국으로 가서 재회하지만 상도에서는 사람을 조선으로 보내 팔도를 다 뒤지고 다닌다는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