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종계변무 (문단 편집) ==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빨리 좀 고쳐주세요 == 그동안 조선에서는 영락제가 하교를 내려 고친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1518년]](조선 [[중종(조선)|중종]] 13년, 명 정덕 13년) 명나라에서 주청사[* 중국에 주청(奏請, 임금에게 아뢰어 청하다.)할 일이 있을 때 보내던 사절.]로 갔다왔던 [[남곤]]과 이계맹이 "걔들 그거 안 고쳤구요, 이번에 《대명회전(大明會典)》이라는 기록서를 편찬한다는데 초본 보니까 거기 태조께서 홍무 8년(1375)에서 홍무 25년(1392) 사이에 고려의 네 왕(4왕, [[공민왕]], [[우왕]], [[창왕]], [[공양왕]])을 시해했다고 쓰여 있던데요?" ~~공민왕 빼면 다 맞는데?~~ 란 보고를 올리는 바람에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이에 중종과 대신들은 과거 태조가 올렸던 조본, 태종이 올렸던 조본과 영락제가 윤허했고 이에 사례한 표 등의 자료 등을 모아 다시 한 번 남곤을 주청사로 임명하여 명나라로 보낸다. 처음에 명의 예부와 대신들은 "뭔 소리임? 니네들 말을 어떻게 믿어?"란 반응을 보였으나 조선에서 태종 문황제[* 영락제의 현재 묘호는 성조이지만 원래 묘호는 태종이었다. 성조는 훗날 추존된 묘호. 그리고 이게 나중에 이 문제에서 명나라측에 꼬투리가 잡히는 원인이 됐다.]의 성지를 받은 사실까지 찾아서 오자 비로소 [[정덕제]]에게 주청이 올라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받아든 정덕제는 "선조의 오명을 씻으려는 조선 국왕의 성효[* 誠孝, 효성.]가 가상하다"는 말과 함께 조훈을 좇아 조선 왕실 종계 문제의 개정을 윤허했다. '''하지만 종계 문제만 윤허받았을 뿐, 4왕 문제는 상큼하게 씹혔다.''' 이로 인해 조선 조정에서도 대책을 논의하여 우선 종계 문제를 윤허한 것에 대해 사은사를 보내고 4왕 문제는 시기를 봐서 다시 한 번 주청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워낙 애매모호한 답변만 받아온지라 귀국한 주청사 남곤은 일 처리가 미흡하다고 소장 사림인 김정에게 격한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이 김정의 동료이자 친구인 자가 바로 조광조. 조광조는 이때 별 말은 없었고 개인적으로 남곤과 친했지만, 그렇다고 남곤을 크게 보지도 않았다. 이 일에 앙심을 품은 남곤이 기묘사화를 일으켜 복수했다고 하기에는 비약이 심하지만, 아무튼 1년 후 사화가 일어났다. 조광조와 김정 등은 유배 후 사사되거나 자결했다. 사실 이 일이 그렇게 컸다고 보기도 뭐한게 조광조와 그 일파가 남곤의 어그로를 끈 일은 이 일을 제외하고도 차고도 넘쳤다. 그렇다고 남곤이 조광조와 그 일파에게 개인적인 앙심을 품은 것도 아니었다. 남곤은 조광조를 실각시키는데는 참여했지만 조광조와 그 일파의 사사에는 끝까지 반대했다. 조광조 사사 결정이 내려진 날 사관은 '정광필(기묘사화 당시 영의정)이 가장 슬퍼했고 남곤 또한 슬퍼했다.' 라고 기록했다.][* 사실 남곤 입장에서는 짜증날만한 일인데, [[조광조]]와 남곤 문서에도 있지만, 남곤과 조광조 일파 등이 가장 성격이 갈렸던 부분이 사장(詞章), 그러니까 글 쓰고 시 짓는 일에 대한 시각이다. 조광조는 그딴 것 별로 필요 없다고 했고, 남곤은 사장이 없으면 외교를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애초에 명에 남곤이 파견되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남곤은 당대 최고의 외교 실무 전문가였다. 외교와는 완전히 담을 쌓은 조광조 일파가 일 처리 완벽하지 못하다고 자기한테 태클을 거니 남곤 입장에서는 화가 날 수 밖에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 일로 [[기묘사화]]가 일어났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1529년]](조선 중종 24년, 명 [[가정제|가정]] 8년) 대명회전의 재편수가 추진되면서 조선 조정은 기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말로만 고치겠다는 약속을 받은 수준이었고, 재편수는 오류를 고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이에 꾸준히 명에 사람을 보내 종계 개정을 확실히 하고자 했고, 명의 예부에서도 영락제와 정덕제의 성지[* 聖旨, 임금의 뜻.]를 근거로 사관에게 지시를 내렸다는 답변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중수대명회전》[* 중수(重修): 낡고 헌 것을 손질하며 고치다.]의 편찬이 진행되고 있으면서도 조선 왕실의 종계 문제는 개정된다는 소식이 없어서 조선 조정은 똥줄이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조정은 "그냥 될 때까지 사신을 계속 보내!"라는 생각으로 명종조에 이르기까지의 60년 동안 그야말로 틈만 나면 주청사를 보냈다. 먼저 1라운드는 중종 대였다. 명 예부에서는 "선(先) 황제의 성지가 있었으니 해주긴 해줄건데, 이게 원래 [[지금은 곤란하다 조금만 기다려달라|몇 년은 걸리는 일이라 바로 안되거든요]]?"란 핑계만 대며 질질 끌고 있었다. 게다가 4왕 문제는 여전히 묵묵부답. 결국 중종 임금은 종계가 개정되었다는 소식만 하염없이 기다리다 승하했다. 2라운드는 [[1551년]](조선 [[명종(조선)|명종]] 6년, 명 가정 30년) 명종 임금이 직접 대신들에게 "얘네들 [[배째라]]로 나오니 안되겠다. 다시 한 번 주청해보자"란 전교를 내리면서 시작됐다. 다만, 대신들은 아직 교정본이 간행되지 않았는데 괜히 주청사를 보내면 명의 신경을 긁을 수도 있으니 좀 기다려보자는 의견을 냈다. 문제는 이 교정본이 간행되지 않았던 이유가, 편수는 거의 다 끝냈는데 양이 워낙 방대하다보니 '''가정제가 아직 읽어보는 중이라 간행하라는 칙령이 안 내려와서'''(…). 게다가 조선에서는 명에 다녀오는 사람들을 통해 동향을 입수하려 했는데 좀처럼 명쾌한 정보가 나오지 않다보니 애간장을 태우고 있었다. 이로 인해 명종 임금 시절 내내 "잘 수정되고 있는 듯하니 주청사는 보내지 않는게 좋겠다", "이미 늦었다. 바로 보내서 확인을 받았어야 됐다"로 조정이 갑론을박을 하고 있었다. 특히 사신만 자꾸 보내다가는 ~~삔또상한 명나라가~~보복으로 영락대전과 다른 기록에 이 일이 상세하게 실리는 것 아니냐면서 덜덜 떠는 모습까지 보였다. 결국 간만 보자는 식으로 몇 번 명나라에 사람을 보내면서 이 문제를 말끔히 해결해보려 했으나, 결국 명종 임금도 종계가 개정되었다는 소식만 기다리다 승하했다. 파이널 라운드는 ~~드디어~~ 명종의 뒤를 이은 [[선조(조선)|선조]] 대. 선조 역시 이 문제의 해결에 적극적이었고 마침내 성과를 본 것도 선조 대였다. 명에서 온 사신을 접견할 때 이 문제를 거론했고, 이후 두 차례에 걸쳐 주청사를 보내어 보다 확실한 개정을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1573년]](조선 선조 6년, 명 [[만력제|만력]] 1년)에 이후백과 윤근수를 주청사로 삼아 파견했을 때는 "뭐? 태종 문황제? 가정제 시절에 이미 [[영락제|성조]]로 추존되신 분인데, 태종?"과 같은 내용의 트집만 잔뜩 잡히고 돌아왔다. 개정 약조는 받아내긴 했지만 4왕 문제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고, 예부에서 쓴소리만 잔뜩 듣고 돌아왔으니 주청사들은 이를 보고하며 죽을 죄를 졌다면서 선조에게 사죄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선조도 "과인이 미처 신경쓰지 못한 불찰이다"라 한탄하며 쓴맛을 달래야만 했다.~~혹 떼러 갔다가 혹 붙이고...~~ 이후 [[1575년]](조선 선조 8년, 명 만력 3년])에 다시 한 번 주청사를 보내 중수대명회전, 속칭 《만력회전(萬曆會典)》에 종계 개정의 일이 수록됐다는 답변을 들었고 선조는 굉장히 기뻐했다. 하지만 문제는 ''''답변'만 들었다는 거지 진짜 해결이 됐는지는 확인이 안 됐다.''' 그 때문에 꾸준히 이 문제를 논의하고 있었고 선조의 인내심도 바닥이 나려 하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