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종계변무 (문단 편집) == 발단 == [[공양왕]] 재위 시절의 [[고려]]는 거의 간판만 겨우 걸고 있는 상태였고, 고려 조정은 사실상 [[이성계]]와 [[정도전]] 일파에게 장악당한 상황이었다. 이 때 이성계에게 축출당한 반이성계파 사람들 중에는 명나라로 망명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 중에 윤이(尹彛)와 이초(李初)라는 인물이 있었다. 이 둘은 이성계에게 앙심을 품고 명나라 조정에다가 "이성계는 [[이인임]]의 아들인데 이인임은 [[공민왕]]을 시해했고, 아들인 이성계는 [[우왕]], [[창왕]]을 시해했다"란 거짓 보고를 올렸다.[* 이인임의 아들이라는 전자는 완전히 거짓이지만, 후자는 현대에 평가하자면 거의 사실이긴 하다. '공식적으로' 죽인 건 공양왕이 더 맞지만,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이성계였다. ~~판 다 깔아놓고 왕한테 죽일까요? 했으니~~] 어찌됐든 신하된 신분으로 본인이 섬기던 왕을 여럿 갈아치웠다는 건 어떤 명분이 있다 해도 유교사회에서 큰 흠이 될 수 있는 부분이었다.[* 퇴위 이후에 우창비왕설로 우왕과 창왕을 '애초에 가짜 왕이자 역적'으로 만들었지만, 어쨌든 둘 다 퇴위 당시에는 왕씨 성을 가진 고려왕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이성계는 그들을 한때 주군으로 섬겼다.] 더구나 명나라는 유교사회의 총 본산이라 할 수 있는 국가였고, 조선은 그 명나라의 유교사회를 주 사상으로 성립된 국가였다. 그런 명나라에게 나라를 연 개국군인 이성계와 그 아버지가 전에 섬기던 군주들을 3명이나 시해했다고 인증하는 것은 유교국가인 조선의 왕가의 명분을 송두리째 뒤흔들 수 있는 위험한 것이었다. 따라서 조선왕조가 유지되는 동안 창업군주로서 신성불가침의 위치였던 이성계의 명예를 지키고, 이성계와 이인임이 부자 관계도 아니었으므로 조선 조정으로서는 이 두 기사를 반드시 수정해야 하는 것이었다. 고려의 내부 사정을 명확히 알 수 없었던 명에서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고 이를 그대로 기록에 남겼다. 이성계는 정도전과 한상질을 명나라로 보내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했고, 명나라 내에서도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그리 믿는 분위기는 아니었기에 정도전 일행은 별 탈없이 귀국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성계 즉위 후에 발생한다. [[1394년]][* 조선 태조 3년, 명 홍무 27년] 홍무제가 사신 황영기를 통해 "옛날 고려 배신 '''이인임의 후사 이성계'''의 지금 이름 이단(李旦)이..."란 구절로 시작하는 국서를 전달한 것이다. 이성계와 조선 조정은 이 국서를 받아들고는 당연히 [[이 뭔 개소리야|"으잉?"이란 반응을 보였다.]] 당연히 거짓말로 알고 있을 줄 알았고, 수정해달라 했을때 대화도 잘 됐으니 별 생각도 안하고 있었는데, 그냥 편지도 아니고 국서에다가 저리 써 보내니 오밤중에 날벼락일 수밖에. 어쨌든 국서의 다른 부분에 정탐병을 파견했다는 것과 같은 억지 트집을 잡는 내용이 있었기에 이를 해명하면서 함께 "신과 인임은 본래 같은 이씨가 아닙니다. 신이 국정을 맡은 뒤부터 인임이 저지른 불법을 모두 다 다루려 하다가, 도리어 그 당류의 미움을 받아서 윤이와 이초가 귀국길에 도망하여 함부로 거짓말을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라 설명하는 주본을 올렸다. 이때도 명나라에서 별다른 반발이나 시끄러운 말이 없었기 때문에 이후 조선에서는 이 사실을 잊고 있었다. 하지만 웬걸, [[1402년]][* 조선 태종 3년, 명 영락 1년] 조온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다음 명나라의 조훈조장에 "신 [[태종(조선)|이방원(李芳遠)]]의 종계(宗系)가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이라 하였다."는 구절이 있음을 보고했다. 소식을 전해들은 태종은 당연히 "아놔, 끝난 얘긴 줄 알았더니 이건 또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인가요?"란 반응을 보였고, 이빈을 명나라 예부로 파견하여 왕실의 족보를 상세히 보고하고 종계를 변무해달라는 주본을 다시 한 번 올린다. 한편 조선의 주본을 전달받은 명의 예부 상서 이지강은 이 사실을 조선 측에서 온 사신들과 논의한 다음 [[영락제]]에게 주청을 올렸다. 사정을 들은 영락제는 "그래? 예전 기록이 잘못됐으면 고쳐야지"란 하교를 내렸고, 기록을 잘못한 자들을 불러들여 처벌하게 한 다음 조선의 사신들을 위로했다. 이후 명나라에서 돌아온 이서와 민무휼은 이 사실을 보고하고 상황이 마무리 됐음을 보고한다. ……로 다 끝났으면 정말 좋았고, 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데헷 하는 역사의 해프닝으로 남았겠지만... 이것은 조선과 명의 기나긴 외교 배틀을 알리는 서막에 불과했다. '''폭탄은 그로부터 무려 100년 이상 지난 중종 때가 돼서야 터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