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족보 (문단 편집) === 인구 대다수의 본관 조작 === [include(틀:토론 합의, this=문단, 토론주소1=SparseScarceAberrantTrouble, 합의사항1='인구 대다수의 본관 조작' 문단 명칭과 세부 내용을 그대로 유지, 토론주소2=SparseScarceAberrantTrouble, 합의사항2='강일순에 대해서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풍자적 내용이 담긴 취소선 내용을 유지할것')] 한국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4대 본관인 '''김해 김씨''', '''밀양 박씨''', '''전주 이씨''', '''경주 김씨'''는 전부 과거 한반도에 존속했던 군주국의 본관이며, 조상이 각각 [[가야]]([[수로왕|김수로]]), [[신라]]([[박혁거세]]), [[조선]]([[이성계]]), [[신라]]([[김알지]])의 군주다. 4대 본관에 속한 인구를 모두 합치면 천만 명을 넘는다. 이 밖에 다른 주요 본관들도 모두 당대 이름난 가문이었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인구가 본관으로만 따지면 왕족 아니면 귀족 후예라는 어처구니 없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조선에서는 양반 내에서도 계급이 분화되어, 한양에 모여 살면서 관직을 독점하는 '권반'과 향촌 내에서 모여 살며 지방에서라도 독자적인 세력을 이루어 살았던 양반 사족인 '향반', 그리고 권력도 경제력도 없이 도태된 '잔반'이 생겨난다. 잔반들은 암울한 경제 사정을 타파하기 위해 부농층에 족보를 팔았고 부농층은 족보를 사고 다른 마을로 이사한 후 양반 행세를 하면 되었다. 아니면 아예 돈을 주고 양반집안에 양자로 들어가기도 했다. >임금이 낮에 경연을 가졌다. 그때 사헌부집의 유수가 아뢰었다. "역관(譯官) 김경희가 자기 마음대로 활자를 만들어서 비치해 둔 다음, 다른 사람들의 족보를 많이 모아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시골에서 군역을 모면하려는 무리들을 꾀어다가 그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책장을 바꾸어 가짜 족보를 만들어 주는 것으로 돈벌이를 하고 있습니다. 형조에 명령하셔서 엄중 조사하여 무거운 벌을 주도록 하십시오." 그러자 [[영조|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 《영조실록》1764년 11월 12일 즉 조선 말기에 이르러 [[https://www.khan.co.kr/article/200412291725401|공명첩 매매와 별보 조작이 성행하기 시작했으며]], 이후에는 대량으로 위조되어 농민들도 단체로 조작하기 시작했다. 양반이란 지위는 단순히 현대적 관점에서 귀족 작위를 받는 명예로써의 가치와는 다르게 농민으로 하여금 가혹한 '군역'을 면제받게 해주는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전근대의 군역은 지금보다 훨씬 가혹했다.] 조선 후기 양반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자 세수가 지속적으로 줄어들게 되었고, 이에 따라 [[흥선대원군]] 시기에 이르러선 양반에게도 [[군포]]를 거두는 [[호포#s-4|호포제]]가 법제화되었다. 그 외에도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평민들이 양반의 직위로 올라서는 경우도 있고, 가난한 조정이 재정을 확보하고자 [[공명첩]]을 발급한 경우도 있지만 이것은 극히 소수다. 이런 양반들의 증가현상은 당시 [[인구조사]]로도 확연히 드러난다. 조선 초기에는 지배계급인 [[양반]]이 가장 적고, [[중인]], [[상민]], [[천민]] 순으로 숫자가 많아지는 피라미드 구조였는데, 이 시기에 상민은 줄어들고 양반은 폭발적으로 늘어나서 일부 지역의 경우에는 오히려 양반이 상민보다 많은 역피라미드의 인구구조가 증폭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때문에 철종 때 공노비 6만명을 해방시켜 상민을 늘렸으나, 그래도 이 추세를 막지는 못했다. 본래 있던 양반들은 위기감을 느끼며 족보를 확장하지 못하도록 [[상소]]도 올리고 [[신문고]]도 때리고 했지만 시대적인 흐름을 그들이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조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최석정]]은 1678년 [[풍양 조씨]] 족보의 서문을 쓰면서 “근래 사대부 집안에서 조금씩 보첩을 '수명(修明)'하는 것을 일삼고 있다”며 족보의 급격한 보급·확산 추세가 사회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수준임을 밝힌 바 있다.] 결국 어정쩡한 타협으로 본래의 양반 족보 안에 "별보"라 하여 혈연관계가 증명되지 않은 사람들의 족보 등재를 묵인하기도 했다. 이를 보다 못한 구한말 지식인들은 족보 위조를 크게 비난했다. 증산종교의 교조 [[강일순]](姜一淳, 1871~1909)의 말에서 잘 드러난다. >지금은 근본으로 다시 돌아가는 시대이니 혈통 줄을 바르게 하라.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바꾸어서 계보를 위조하는 자는 다 죽으리라. ~~강일순의 주장대로라면 이 나라의 상당수는 모두 죽어야 한다.~~ ~~ 나라의 패륜되는 한국산 사이비종교들의 시조가 할말은 아닌거 같은데.~~ 역사학자 박홍갑은 2016년 9월15일 [[YTN]]과의 인터뷰에서 족보가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해 설명하였는데, 박홍갑의 발언에 의하면 본관이 일반적으로 보편화된 것은 고려시대가 되어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각 지역 토착 호족세력에게 본관을 지정해주면서부터라고 한다. 따라서 "본관은 생물학적인 계보라기보다는 사회, 문화적인 계보"에 가깝다. 즉, 종가집을 비롯한 일부 예외적인 케이스를 제외하면 조상의 DNA와 자신의 DNA가 일치하지 않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http://v.media.daum.net/v/20160915120040640|관련 기사]] 굳이 자신의 조상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고 싶다면 족보에 기록된 조상과 본인의 DNA 대조검증을 통해 알아볼 수 있지만, 이를 위해서는 조상의 묘를 열어야 하는데 조상의 묘가 파헤쳐지는 것을 해당 종가, 종친회와 문중에서 용납하지는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어디까지나 족보상의 조상이 자신의 진짜 조상인지 아닌지를 알아낼 수 있을 뿐, 가짜로 판명날 경우 자신의 진짜 조상이 누구인지 알아내기는 불가능하다.''' 위조를 했던 조상이 무슨 일을 했는지,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 누구의 후손인지에 대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사실상 거의 없으며, 설령 있다고 한들 단편적인 내용일 뿐 구체적인 기록까지는 아니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