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족보 (문단 편집) === [[사료(역사)|사료]]로서의 높은 가치 === [include(틀:토론 합의, this=문단, 토론주소1=SparseScarceAberrantTrouble, 합의사항1='현행 문단의 내용을 그대로 유지한다')]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서 35년 넘게 한국학을 개척, 발전시킨 에드워드 와그너 박사(1924 ~ 2001년)는 한국학을 연구하면서 족보에 대한 연구를 혁신시킨 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와그너는 족보에 나타난 문과 급제자를 통해 유력 문중에 관한 연구를 통해 [[http://weekly.hankooki.com/lpage/cover/200704/wk2007043015274282190.htm|각 유력 문중들이 어떻게 해서 유력자 집안이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족보에 충실히 담겨져 있다는것을 알아내었다.]] [[유득공]]은 《[[발해고]]》를 편찬하면서 족보인 《만성통고》와 《영순태씨족보(永順太氏族譜)》를 참고 자료로 삼았고, [[이병도]]와 더불어 한국사 학계의 1세대 대표 학자로 꼽히는 [[이기백(1924)|이기백]] 교수는 생전에 신라 말기의 [[사병]](私兵) 문제를 연구한 「신라사병고(新羅私兵考)」를 발표하면서 흥양 이씨 족보를 역사적 자료로 활용했고[* 조선 후기에 향리층들이 모여 지은 《연조귀감(椽曹龜鑑)》이라는 책에 인용된 [[향리]]들의 족보 가운데 《흥양이씨보(興陽李氏譜)》의 "[[신라]] 말기에 귀족의 후예들이 다투어 호무(豪武)를 써서 주(州)와 현(縣)을 제패하였다," 하는 기술이 인용되었는데, [[이기백(1924)|이기백]]은 이 기록이 [[신라]] 말기 지방의 세력가 즉 [[호족(한국사)|호족]]이 군사력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증거이며 너무도 당시의 실정을 잘 드러내는 기록이라고 평가했다.] 진주 소씨 족보를 통해 상대등 알천(閼川)을 새롭게 인식했다며 족보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 바 있다. 진주 소씨는 [[신라]]의 상대등 알천의 후손을 칭하는 집안으로, [[이기백(1924)|이기백]]에 따르면 1979년에 진주 소씨 서울 종친회에서 사람이 찾아와 종친회보(宗親會報)에 알천에 대한 글을 써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었는데 알천은 [[신라]]의 왕족이고 김씨이므로 소씨일 수가 없다는 생각에 적당히 거절하여 보냈는데, 나중에야 신라 말에 [[김해]](金海)의 호족이었던 김율희(金律熙)가 소율희(蘇律熙)라고도 기록되기도 한다는 점을 알게 되었고, 金은 음이 '김' · '금'이지만 그 뜻은 '쇠'이기 때문에 蘇라는 글자와 서로 통용되어 쓰일 수 있을 뿐 아니라, 8세기 [[원성왕]]과 왕위를 다투다 패한 왕족 김주원이 [[강릉]]으로 낙향한 것처럼 실제로 [[김춘추]]와의 왕위 계승을 두고 대립하기도 했던 알천이 김춘추에게 패한 뒤 지방인 [[진주]]로 낙향했을 가능성을 유추해내기에 이르렀다. 족보의 기록을 하나의 단서로 삼아 조상[* 무려 700년 전 [[고려]] 시대의 인물인 허유전(1243∼1323)이었다.]의 무덤을 찾은 사례가 [[토요미스테리극장]]을 통해 소개된 일도 있다.[[http://rsgzzip.tistory.com/790|관련내용 리뷰]] 특히 족보들 중에서도 양반 종가집에서 대대로 계승하는 족보는 그 금전적, 문헌학적[* 족보가 제작되던 당시의 시대상이나 작성 배경 같은 것.], [[서지학]]적, 사회학적[* [[한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인 [[안동 권씨]] 성화보나 문화 류씨 가정보 같은 경우 후대 족보와 비교해 보면 부계뿐 아니라 모계 역시 빠지지 않고 기록되어 있어 [[조선]] 중기 이후 시대상의 변화 과정을 여타 족보들과 비교해 확연하게 알 수 있다.][* 특히 직업적 특성상 양자를 들여 집안의 계보를 이었던 [[내시]]들의 경우 "낳아주신 은혜만큼이나 키워주신 은혜도 귀중하다"는 이유로 양자로 이은 계보를 족보 기록으로써 정리했다. 이것이 양세계보(養世系譜). [[조선]] 시대의 [[내시]]들 자신이 남긴 몇 안 되는 기록이다.] 가치가 상당하다. 종합하자면 조선 말기에 성행했던 별보 등재와 공명첩 매매와는 별개로, 각 본관들의 형성과 발전 과정을 살펴보는 큰 맥락의 사료적 가치는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일부 종가집을 제외한 대다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본관 조상이 자신의 진짜 조상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는게 문제지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