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희제 (문단 편집) == 생애 == 조희제는 1873년 12월 10일 전라도 임실현 덕치면 고덕리(현 전라북도 임실군 덕치면 회문리 절골)의 함안 조씨 집성촌에서 [[참봉]]을 지낸 조병용(趙柄鏞)과 어머니 [[안동 김씨]] 김헌기(金憲基)의 딸 사이에서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일제에 맞서 목숨을 끊은 [[송병선]]과 항일투쟁에 나섰던 [[기우만]] 의병장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으며 유년기부터 투철한 항일의식을 배웠다. 이후 수십 년에 걸쳐 각지를 돌아다니며 독립투사들의 항일사적과 애국지사들의 행적 등 항일투쟁 기록을 모았다. 또한, 법정에서 애국지사들의 재판 과정을 방청하며 기록하기도 하였다. 명성을 떨치고 그 행적이 역사에 잘 기록된 인사보다는 초야에 묻힌 애국지사들의 충절을 기록했다. 선생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책의 표지에 덕촌수록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1질은 책상 위에 두고, 1질은 궤짝에 넣어 마루 밑 땅에 묻었다. 덕촌수록은 그가 1895년 을미사변 이후부터 1918년까지 의병장, 애국지사들의 절의실적(節義實蹟)을 모아 전기체로 서술한 6권 2책이다. 그는 염재야록 원고를 완성하고 일제 경찰의 관심을 피하기 위하여 책의 표지에는 덕촌수록(悳村隨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덕촌은 염재가 살던 덕치를 가리킨다. 그러나 염재야록 편찬 사실이 1938년 일제 경찰에 발각되면서 서문을 썼던 [[최병심]], 발문을 썼던 이병은(李炳殷), 교정을 보았던 김영한(金寗漢) 등과 함께 선생은 임실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그의 글은 물론이고 집안 대대로 간직해온 다양한 자료들이 모두 압수되었다. 임실경찰서에 연행되어 거의 목숨이 끊어질 정도로 혹독한 고문을 당한 후 집으로 돌아왔으나 울분을 참지 못하다가 일제의 단발 종용에 결국 자결 순국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