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치훈 (문단 편집) == 생애 == [[파일:/news/201507/30/joongang/20150730005301864tssm.jpg]] 1962년 일본에 가는 조치훈, 옆에 있는 남자는 숙부 [[조남철]] 九단. 어릴 때 일본으로 넘어가 [[기타니 미노루]] 도장에서 공부했다. 한국 바둑계의 대원로이자 대국수라는 칭호까지 받은 [[조남철]] 九단의 조카로 집안 전체가 바둑 가문인[* 형 조상연은 일본기원 은퇴 七단, 외조카 [[최규병]]/이성재는 한국기원 九단.] 명문가 출신인데다가 천재성이 있어서 어릴 적부터 주목받았다. 그 때문에 공부를 등한시한 데다가 어릴 적에 일본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따돌림을 많이 당해 발전이 다소 늦었다. 훗날 라이벌이 된 [[고바야시 고이치]]가 한참 하수였는데 어느새 자신을 앞질러 먼저 입단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 정진하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고바야시 고이치는 조치훈보다 4살 연상이다. 하지만 그가 입문 당시 접바둑 6점 정도로 치수 차이가 컸다. 애당초 고바야시 고이치는 같은 사문인 기타니 미노루 도장의 조치훈보다 나이 많은 후배다. 어린 기사들 사이에서는 한 살 차이가 정말로 크고, 조치훈은 고바야시보다 시기상으로는 늦지만 더 어린 나이에 입단했다.] 실력을 갈고 닦은 뒤 본격적으로 일본 내 기전에 뛰어들어 1976년 20세 5개월의 나이로 왕좌(王座) 타이틀을 따냈는데, 당시 기준 역대 최연소 7대 타이틀 보유자라는 진기록도 세우게 되었다.[* 참고로 이 기록은 2009년에 [[이야마 유타]]가 20세 4개월의 나이로 명인 타이틀을 따내며 경신했고, 2019년에 [[시바노 도라마루]]가 19세 11개월의 나이로 명인을 따내면서 역대 3위 기록에 랭크 중이다.] 그리고 1980년, 오다케 九단을 꺾고 명인 타이틀을 획득하여 자신이 일본에 오기 전에 한 "[[명인전#s-2|명인위]]를 얻기 전 한국에 오지 않겠다."라는 말[* 다만 2020년 인터뷰에 따르면 허구라고 한다. 본인은 비행기를 타니 신난다 하며 따라갔다고.]을 증명하며 금의환향한다. 이 일로 바둑인 최초로 은관문화훈장을 수여받았으며 [[병역면제]] 자격까지 받았다. 단, 이 내용은 조치훈 기사의 자서전 '목숨을 걸고 둔다(1981)'[[http://tirano.egloos.com/4094196|#]]의 내용과 다르다. 자서전에는 도일하고 13년 뒤에(당시 19세, 1975년) 집안에 일이 있어서 잠깐 다녀왔으며, 병역면제는 국민학교 입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어쨌든 1980년 명인전 우승 이후 병역면제를 받은 것은 사실이다. 반면 신문 보도는 [[https://www.joongang.co.kr/article/1437984|신검 불합격으로 나왔다]]. 똑같이 일본기원에서 한국 이름을 드높인 신인 [[조훈현]]도 병역면제 이야기가 나왔지만 거절되고 결국 조훈현은 귀국해서 병역을 마쳤다. 조훈현은 구 일본 신인왕전 타이틀은 있었지만, 7대 타이틀을 따지 못했기 때문에 병역면제를 못 받았다. [[파일:external/dimg.donga.com/77657867.1.jpg]] 1980년 명인전 결정국 계가 직후의 상황. 오른쪽이 조치훈, 왼쪽이 오타케 히데오 기사. 이 대국이 일본 전국에 생중계되었고 조치훈이 스타 덤에 올랐다.[* 여담으로 당시 4국에서 패와 관련되어 웃지 못할 사정으로 조치훈이 반칙을 저질러(원래대로라면 조치훈의 패배가 맞지만, 기록자도 책임이 있었기에 입회인이 무승부로 선언.) 초유의 무승부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자세한 전말은 [[패(바둑)]] 문서 참고. 그래도 이전에 이미 2승 1패로 승기를 확보하였고 다음 5, 6국서도 내리 이겨 조치훈이 압승을 거두었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었다.] 이어서 1983년 기성(棋聖)전에서 [[후지사와 슈코]]를 이기며 [[(대)기성전|기성]]·[[명인전(일본)|명인]]·[[혼인보]] 타이틀을 동시에 차지해 일본 바둑계 최초의 대삼관(大三冠)을 달성했다. 이 기성전에 기가 막힌 에피소드가 있는데, 당시 후지사와 九단은 "나는 1년에 4번만 이기면 된다."라고 말하고 다닐 정도로 기성전 이외에는 관심이 없는 기사로 유명했다.[* 다른 기전에는 나가더라도 몇십 수 두다가 돌을 던지는 등 정말 대충 임했을 정도다. 쇼기계도 비슷한데 프로 기전이 여러 개인 프로 바둑계에서는 가장 서열 높은 대회 우승 기록을 호칭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압도적으로 상금이 많은 랭킹 1위 기성전 우승자면 당연히 기성전에 올인하고 바둑계에서도 기성전 우승자 타이틀로 소개받는다. 현재 기성전의 우승 상금은 5천만 엔으로 일본 내 바둑 기전 중 우승 상금이 제일 많은데, 이미 저 시절도 우승 상금이 5천만 엔이었다. 말 그대로 기성전만 우승하면 1년 내내 흥청망청 쓰고도 남을 수준이었다. 문제는 후지사와는 술을 워낙 좋아하고 도박 중독이어서 그걸로도 모자랐다고 한다.] 그런데 조치훈이 20대 젊은 나이에 일본 기사들을 추풍낙엽처럼 쓰러뜨리고 다닌다는 소문을 듣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아래 발언들은 각주가 본심으로 당시 일본 바둑계의 성향에 어울리는 [[트래시 토크]] 신경전이라고 할 수 있다. >'''조치훈 군이 그렇게 센가? 내가 한 번 찾아가봐야겠군. [br] (조치훈이 가지고 있는 타이틀전에서 도전자로 올라가야겠군.)''' 1983년 당시 조치훈이 7대 타이틀 중 명인 하나만 갖고 있었던 상태였기 때문에 자신이 남은 하나를 빼앗아주겠다며 도전장을 던졌다. 조치훈도 이 언급을 듣곤 다음과 같이 받아쳤다고 한다. >'''대선배님을 어떻게 찾아오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찾아뵙겠습니다. [br] (대선배님이 갖고 계신 [[기성전]]의 도전자가 되겠습니다.)''' 후지사와의 언급을 인용해 그가 가지고 있는 기성 타이틀에 도전하겠다고 맞불을 놓은 것이다. 이후 조치훈이 도전자 결정전에서 이겨 두 기사간의 기성 타이틀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후지사와는 기성전 전야제에서 '''"딱 네 판만 가르쳐주겠다."''' (4:0으로 이겨주겠다) 라고 선전포고를 했다. 이에 조치훈도 물러서지 않고 '''"딱 세 판만 배우겠습니다."''' (세 판만 져주고 나머지 4판은 다 이기겠다) 라고 대답했다. 당시 바둑계는 도전자의 건방지고 패기가 넘치는 발언에 놀랐는데 관록인지 진짜 1년을 다 투자해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후지사와 슈코가 내리 1~3국을 이기며 3:0이 되었다. 그런데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귀신같이 4국부터 내리 조치훈이 다 이긴다]]. 일본 바둑계에 길이 남을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의 [[리버스 스윕]]. 훗날 [[조치훈]]이 회고한 바에 따르면, '''"명인 타이틀 보유자라는 명예가 있는데 4:0으로 지면 꼴사나우니 나중에 지더라도 1승 이상은 따보자."''' 같은 생각으로 제4국에 초집중하여 임했는데 이게 잘 먹혔다고 한다. 우승 인터뷰에서 조치훈 9단은 "후지사와 선배님의 기성 타이틀이 이번으로 마지막일 것을 생각하면 정말 가슴이 찢어집니다."라고 도발했고, 정말로 [[후지사와 슈코]] 9단은 이 패배 이후로 죽을 때까지 기성 타이틀을 따기는커녕 타이틀 도전기에도 올라오지 못했다.[* 그래도 1990, 1991년 왕좌전을 2연패했다. 당시 후지사와 슈코 9단은 60대 후반.] 1987년 천원전에서 [[고바야시 고이치]]를 이기며 위에 언급된 7대 타이틀을 최소 1번씩 차지해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일본기원의 첫 기사가 되었다. 바둑 내적으로 치열할 뿐만 아니라 대국에 임하는 태도도 본받을 만하다. 조치훈의 "목숨을 걸고 둔다."라는 말로 대표되는 태도 앞에서 모두가 숙연해지곤 했다. 대표적으로 1986년 기성전 도전기가 꼽히는데, 제1국이 열리기 며칠 전에 교통사고를 당해 전치 3개월 중상을 입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저녁까지 바둑 공부를 하고 배가 고파서 야참을 사먹으러 나갔다가 자신이 몰던 자동차와 어느 오토바이의 가벼운 접촉사고가 났다. 그런데 조치훈이 차에서 내려 오토바이 운전자를 일으켜 세우는 와중에 갑자기 다른 차가 나타나서 그대로 두 사람을 치어버렸다.[* 당시 의사가 밝힌 부상 부위는 다음과 같았다. 1) 오른쪽 정강이의 두 뼈가 모두 부러지고 뼈가 살 밖으로 삐져나옴. 2) 오른쪽 무릎 관절에서 퇴골(허벅지뼈)의 연골이 떨어져 나감. 3) 왼쪽 무릎 관절에서 전십자인대 파열, 후십자인대 손상, 대퇴골의 연골 골절. 4) 왼손 관절부에서 요골과 척골 골절 5) 머리의 외상.] 진짜로 머리(뇌)와 오른손을 제외하고 전신이 너덜너덜해지는, 말 그대로 목숨만 겨우 건진 수준의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이때 기성전 도전자로 [[고바야시 고이치]]가 올라온 상태였는데, 기성전은 [[봉수]]를 통한 이틀치 바둑을 둘 만큼 체력 소모가 심한 대회인 터라 중상을 입은 조치훈이 참여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무리였다. 그런데 그는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에겐 머리가 있고, 또 오른손이 있다."며 사고 후 겨우 열흘만에 기어이 휠체어에 앉아 [[고바야시 고이치]]와의 타이틀 도전기에 임한다.[* 이 에피소드에서 무마취 수술을 주장했다는 설이 있는데, 그건 지인이던 요네나가 쇼기 기사가 퍼뜨린 소문이라고 조치훈이 직접 밝혔다.] 이것이 바로 일본 바둑계 전설 중 하나로 불리는 『휠체어 대국』. 일본기원 규정은 천재지변 정도가 아니면 대국이 연기되는 일은 없으며, 참여한 기사가 사고로 부상을 입더라도 대국 연기는 절대로 안되고 기권패가 될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조치훈이 휠체어 대국을 감행한 투혼 그 자체로 사람들에게 감탄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2승 4패로 타이틀 방어에는 실패했지만, 모든 사람이 타이틀을 획득한 고바야시보다 '그 상태로 2승이나 거두다니 대단하다'라며 조치훈에게 갈채를 보냈다. 특히 조치훈이 완승한 제3국은 도저히 그런 중상을 입은 사람의 바둑으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명국으로 불렸다니 그의 투혼과 집중력이 대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http://tirano.egloos.com/4094196|조치훈은 당시 3국에서 흑을 잡았고]], 251수 끝에 1집반 승을 거두었다. [[https://www.kifudepot.net/kifucontents.php?id=YFPY6MDgSZ2I1LCkbzFLRA%3D%3D|당시 기보 보기]]. 바둑 역사에 보기 드문 중앙 혈전이 벌어진 대국이다.] 그 자신의 '목숨을 걸고 둔다.'는 말이 실제로 증명된 장면이라 하겠다. 실제 사진을 보면 눈이 번쩍번쩍 하는 느낌이다. 이 때문에 고바야시는 기성 타이틀을 획득하고서도 모두가 고바야시의 4승이 아닌 조치훈의 2승을 칭송하는 [[아웃 오브 안중]] 상태가 되어버린다. 고바야시는 조치훈에 필적할 만한 엄청난 기사였고 상대전적도 비슷하게 가져갔지만, 이후의 도전기들에서는 조치훈에게 처절하게 패했다. 3국에서 조치훈에게 지자, 고바야시는 자기는 역시 의자에 앉지 않고, 정좌한 채로 두겠다고 주장. 4국 이후로는 주최측의 조정으로 고바야시는 무릎을 꿇고, 조치훈은 휠체어에 앉을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했다. 고바야시도 조치훈의 투혼에 굴하지 않고 진지하게 승부에 임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여담으로 조치훈과 고바야시는 매번 7대 타이틀전에서 붙었던 터라 세간에서 라이벌로 불렸고 실제로 사이가 나빴으나, 서로 전력을 다한 이 도전기를 통해 크게 호전되었다고 조치훈은 회고했다. 자세한 것은 [[고바야시 고이치]] 항목 참조. [[파일:external/sunday.joins.com/13023539.jpg]] 휠체어를 타고 대국에 임하고 있는 조치훈 九단. 반대편에 머리를 깎은 사람이 고바야시 九단이다.[* 이 대국 전에 중일 슈퍼대항전 매치가 있었고 일본 대표팀은 반드시 이기고 돌아온다고 다짐하고 나갔으나 져서 돌아온 바람에, 일본 대표선수 전원이 모두 삭발을 해서 고바야시의 머리가 짧다. 참고로 이때 일본 대표팀은 마지막 남은 [[녜웨이핑]] 한명에게 남은 선수가 모두 무너져 졌다.] 이 교통사고와 기성전 타이틀 방어 실패 이후 잠시 동안 정상권에서 멀어지리라 생각되었으나 곧 기량을 회복, 기성(碁聖) 타이틀과 천원(天元)타이틀을 획득하고 89년 혼인보전 도전기에서 [[다케미야 마사키]]를 4-0으로 완승을 거두었다. 혼인보 타이틀을 획득한 뒤부터 본격적으로 정상권에 복귀, 혼인보전 10연패를 비롯 엄청난 커리어를 쌓아올리며 다시금 전성기를 내달렸다.[* 그러나 사고 후유증으로 인해 뼈가 약해져서 의자에 앉는 평소 대국과 달리, 무릎을 꿇은 채 두는 도전기에 대비해 수영장에서 무릎을 단련한다고 한다.] 또한 위의 각주에 언급된 10연패 조건을 충족해 즉시사용의 권한이 생겨 25대 혼인보 치쿤(治勲)이 되었다.[* 21대까지는 에도 시대에 역사적으로 [[혼인보]]를 계승한 인물이고, 22대 이후로는 타이틀 전에서 조건을 만족한 사람에서 주어지는 형식이 됐다. [[혼인보]]의 존칭은 선대 혼인보처럼 이름에 '秀', '丈', '元', '昭', '寿' 등의 글자를 넣어 실명과 다른 존칭을 쓰는 것이 일반적이나 조치훈은 본명 이외의 다른 이름 사용을 거부하여 본명인 치훈을 그대로 쓴다. 조치훈이 일본인이 아닌 외국인이었기에 이런 주장에 일본기원이 한 발 물러선 것이다.] 본격적으로 세계대회가 열렸을 때 조치훈은 이미 전성기를 어느 정도 넘겨 큰 족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살 위인 조훈현처럼 간간히 나타나 활약하였다. 1991년 [[후지쯔배]]도 우승하면서[* 다만 첸위핑 九단이 출전을 포기하면서 결승전 대국은 기권승으로 끝났다. 3위 결정전에서도 마찬가지로 기권승이 나왔다. 첸위핑이 준결승 직전에 뇌출혈로 쓰러졌기 때문이다.] 소소하게 활약하다 2003년에 대이변을 일으키는데, 제8회 [[삼성화재배]]에서 주최측 와일드 카드를 배정받아 원성진, 조훈현 등의 강자를 꺾고 결승에 올라 박영훈에게 첫 판을 내주고 2-1 역전 우승을 거두었다. 2021 기준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도 세계대회에서 와일드카드 출전자가 우승한 것은 조치훈이 유일무이하다. 삼성화재배 한다고 한국에 와서 원성진 당시 五단한테 보여준 예쁘게 사는 희생타의 묘수는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 아무도 예상 못했다. [[파일:attachment/080315-ki.jpg]] [[2008년]] [[일본]] [[(대)기성전|기성전]] 6국에서 도전자 신분으로 기성 [[야마시타 게이고]]한테 계가를 하는 장면. 6국에서 미세한 접전 끝에 조치훈이 이겨서 7국까지 갔는데 7국에서 조치훈이 패해 타이틀 찬탈에 실패했다.[* 이 당시 야마시타는 31살의 나이인데 반해, 조치훈은 53세였다. 기성전 같은 거물급 타이틀전은 젊은 기사들이 활약하는 빈도가 압도적이라는 걸 생각하면 풀 세트 접전까지 간 것도 정말 대단하다고 보는 게 맞다.] 현재는 일본 7대 타이틀전에서는 뚜렷한 성적은 못내고 있으나, 시니어 기전에서는 상당한 활약을 보여주고 계시다. 2017년에는 [[한국시니어바둑리그]]에 출전하면서 한국 기전에 나서기도 했다. 부산 출신이라 [[한국시니어바둑리그/2017시즌|2017 한국시니어바둑리그]]에서 고향팀인 부산 KH에너지 소속으로 뛰었다. 정규리그 6승 1패를 기록하였고 챔피언 결정전에서도 활약하며 시즌 MVP를 수상했다. 한국에서 받은 첫 상이었다. 어떻게 나가게 되었는지는 항목 참조. 2017 바둑대상 시니어기사상을 수상하였다. 2018년에도 부산 KH에너지 소속으로 [[한국시니어바둑리그]]에 참가, 작년과 마찬가지로 대활약하며 리그 2연패에 공헌했다. 또한 일본바둑계에서 전설을 쓴 위대한 기사이자 현재도 대단한 기량을 선보이고 있는 조 九단과 한 수 둬보고 싶어하는 한국기사들이 줄을 설만큼 인기가 대단하다. 시니어 리그 일정 때문에 일주일에 2~3일은 한국에 머물고 있는데, 리그일정을 소화하는 1일을 뺀 나머지 시간은 한국기원 소속의 후배기사들과 수십판의 복기 + 대국을 한다고. 일본기원에서는 아무리 자기가 원로 겸 [[개그 캐릭터]]로 불리지만 마음대로 다니지는 못하는데, 한국기원은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보니 오히려 정감간다고 한다. 2018 바둑대상에서 시니어기사상을 수상하였다. [[2019년]] 제9회 마스터스 컵에서[* 일본기원 소속 기사 중 50세 이상이면서 7대 타이틀 홀더 및 경험자만이 참여하는 제한기전.] 고마쓰 히데키 九단을 꺽고 아주 오랜만에 개인전 우승을 차지했다. 2019년에도 부산 KH에너지 소속으로 리그에서 13전 전승을 기록하면서 통합 3연패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선수 최대 보유 연한이 3년이라 내년부턴 다른 팀에서밖에 뛸 수 없게 되었는데, 인터뷰 소감에서 팀내 형, 동생들과 헤어져야 하는 것도 그렇고, 일정 때문에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것도 고령이라 부담이 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에 다음 시즌에도 또 시니어리그에서 볼 수 있을지는 불명. 아쉽게도 2020시즌은 [[코로나 19]] 여파로 인해 불참을 결정했다. 일본내 시니어 기전이나 타이틀전 입회인으로 간간히 얼굴을 비추는 중. 2021년 10월에 열린 제47기 명인전 최종예선 1회전에서 [[셰이민]] 七단에게 불계패해 오랜만에 메이저 기전 본선에 올라갈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2023년 4월 8일 열린 제2회 테이케이배 레전드전[* 60세 이상이면서 7대 타이틀 획득 경험자, 전년도 7대 타이틀전 상금랭킹 상위의 기사, 테이케이배 여류 레전드전 베스트4에 진출한 여류기사가 참여하는 제한기전.] 결승에서 [[고바야시 사토루]] 九단에게 불계승을 거두고 우승하여 4년만에 개인전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동월 13일에는 제71기 왕좌전 최종예선 결승에서 오바 준야 七단에게 패하여 본선 진출에 실패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